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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이시여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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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02.02.(금)

 

시련이시여

나는 선물을 바란 적이 없다. 내가 원한 건 오로지 당신이었다. 금은보화를 주어도 당신이 사라지면 재와 티끌일 뿐이다.

당신은 내 청을 들어준 적이 없다. 선물하지 말아 달라고, 당신이 내 선물이라고 했지만, 당신은 손 대신 선물을 내밀었다. 나는 아프다고, 하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당신은 아프지 말라며 벼랑 끝에 선 나에게 먹지도 못할 무거운 선물을 안기며 밀었다. 그래서 더 빨리 추락했다.

밑바닥에서 죽지도 못한 채 고통에 차 비명을 질렀지만, 저 위의 당신은 등을 돌려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응원한다고 했지만, 당신은 내게 하고 싶은 대로 할 뿐 내 호소를 듣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묻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이고, 당신과의 교제와 소통인데, 이걸 앗아가는 게 무슨 응원일까. 당신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사라지며 내 미래를 지웠다. 당신이 있기에 꿈꾸고 당신이 있어야 보이는 미래는 눈을 감았다. 당신이 있어야 의미가 있고 당신이 있기에 의지를 발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당신은 내 호소를 믿지 않고 무시했다.

팬은 아이돌과 만나고 싶어하는 걸까, 아이돌을 자기 마음대로 치장하고 싶은 걸까. 정작 아이돌이 요청하는 걸 묵살하고 선물 공세만 하는 팬이 있다면, 그건 그 아이돌을 사랑하는 걸까. 아니, 그건 팬이 맞을까. 그렇지, 아이돌(idol)이 우상이란 뜻이지. 우상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투영한 움직이지 않는 죽은 대상일 뿐. 인형 놀이하듯 사람 마음대로 입히고 칠하고 벗기고 지울 뿐. 돌이나 나무, 금속 조각에 입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그 말이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건 당연지사일 뿐. 흔히 우상은 숭배의 대상이라 여겨지지만, 실은 마음 한 마디 전할 수 없는 가련한 존재다.

오히려 나는 당신에게 부담스러운 연락을 해오고 만나기까지 하는 무슨 무슨 장이나 무슨 무슨 외국인보다 못하다. 당신은 내가 그들과 다르다고 했는데, 맞다. 나는 당신에게 그들보다 못하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기는커녕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내 목소리가 닿을 수도 없다.

 



머릿속에 있던 글을 작성하는 지금은 금요일이고,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청년 연합 수련회를 다녀왔다. 수련회 첫날, 호흡기에서 쎄한 느낌이 들었다. 곧바로 마스크를 썼지만 걸렸구나 싶었다. A형 독감은 사람을 반 시체로 만들어놨다. 나에게는 특이한 징크스(?)가 있는데, 수련회 때 크게 아플수록 하나님을 깊이 만난다는 것이다. 전에 IVF(한국기독학생회)의 LTC(리더 훈련 수련회) 때 메니에르를 극심히 앓았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주의 것이라는 깊은 확신과, 그래서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는 마음을 회복했다.

하필 수련회 때 아픈 것은 시험이라고 볼 수도 있고 우연이나 부주의 때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표현하기를 주저했던 다른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내가 깊어지는 걸 방해하려는 악한 영의 개입이다. 이번 수련회 첫째 날을 보내고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3시쯤에 잠들었는데, 악몽을 꾸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꿈에서 나는 악한 세력과 싸우고 있었고, 깨고 다시 잠이 들어도 신기하게 끊긴 지점에서 다시 꿈이 시작됐다. 어떤 때에는 꿈에서 내지른 주먹 4연타를 실제로도 휘두르며 상반신을 일으키며 깨기도 했다. 물론 꿈에서 적은 뒷걸음질 치며 피했고, 실제로도 맞지 않았다. 3시간 동안 악몽과의 사투 끝에, 이번에는 중간에 깨는 느낌이 아니라 꿈의 결말을 보며 깼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승리를 거두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예배에 갈 시간이었다. 새벽 예배를 포함하여 수련회의 모든 프로그램에 은혜가 충만했고 눈물이 가득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중에 따로 설교 형식으로 적겠지만, 이 과정에서 교회 청년부의 위기를 확인했다. 그중 하나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일서 4:20)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본, 아니 경험한 것이었다. 수련회 강단에서는 뒤처진 200명을 챙기는 다윗의 공동주의, 앞서 말한 요한일서 4장 20절 등이 설교되었지만, 일부 어린 청년들은 적용에 미숙함과 아직은 좁은 지경을 보였다.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6, 마태복음 5:44)고 하셨지만, 그들은 환자를 살피지 않았고 원래 알던 친구들끼리만 어울렸다.


몸이 아플 때 방치되는 것만큼 서러운 게 없다고 했던가. 그리고 수련회 다음날, 당신은 내가 아픈 걸 알면서 나를 더 아프게 찌르고는 버렸다.


수련회 전후로 시련은 끝이 없었다. 수련회 출발 전날 영상 공유 플랫폼에 항소 영상을 보냈으나, 수련회 첫날 승인 거부 메일을 받았다. 기간 내내 A형 독감에 시달렸고, 무정함에 서러워했고, 수련회를 마치고서는 살아가는 이유가 나를 죽였다.


그래도, 시련에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나는 사랑을 한다. 그리고 수련회 기간 부른 찬양의 가사가 내 호흡을 붙어 있게 한다.


보이는 상황에 무너질지라도
예수 능력이 나를 붙드네
보이지 않아도 주님만 따르네
내 평생 주님을 노래하리라
- 마커스, <주만 의지해>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그 즐거움을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 김명식, <예수 예수 예수>에서

 

 

 

주는 나를 배반치 않고, 나도 주를 배반치 않았다. 간곡히 바라기는 당신이, 누군가라도, 이 위로의 주를 만나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언젠가 당신은 내가 살인자라도 좋다고 했지만, 나는 당신이 나를 죽여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은 무수히 말을 바꿔 왔지만, 나는 십자가처럼 이 자리에 두 팔 벌리고 기다리고 있겠다. 당신이 오기까지.

 

 

 

(실은 코디 로즈와 함께 경력 면에서 시련의 아이콘들인 드류 매킨타이어, 핀 밸러, 나카무라 신스케 등도 글로 적어보려고 했으나 뇌절일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놀랍게도 글을 올리며 찬양을 삽입하려고 유튜브를 켜자 첫 화면에 위 영상이 5시간 전에 올라왔다고 떠 있었다. 그래서 이 영상으로 대신한다. 쓰려던 글은 이들의 시련도 불가항력적이거나 자충수인 경우가 많았지만, 각본상 시련도 많았다는 점이고, 결국엔 돈 잘 벌고 결혼도 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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