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에 주인과 일꾼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일찍 부른 일꾼이나 나중에 부른 일꾼이나 삯을 똑같이 주는 것을 보고 먼저 온 일꾼들이 화를 내며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딱 잘라 말한다. 나는 너희에 대하여 약속한 값을 주었을 뿐이다, 내 돈으로 삯을 주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이는 먼저 부르나 나중에 부르나 동일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불공평한 사랑’을 나타낸다. 본문에 보면 가장 나중에 부른 일꾼들은 부르는 사람이 없어 빈둥거리고 있다고 했다. 한마디로 ‘백수’들이다. 또는 유능한 일꾼들이 다 불려갔기에 남은 무능한 자, 비천한 자, 약한 자, 병든 자, 몸이 불편한 자나 부자유한 자들이다. 주께서는 이들을 불러 일할 수 있음을 보이시고 다른 멀쩡한 사람들에게 주셨던 것과 같은 은혜를 주신다. 약한 자를 사랑하시는 불공평한 은혜다. 바울은 이러한 원리를 알고 그리스도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기 위하여 약해지기를 택했다.
구약에도 비슷한 예가 나온다. 다윗 왕은 스루야의 아들들, 특히 요압을 견제하면서, 전공이 별로 없는 자, 지시를 어긴 자, 적군에 속해 있던 자 등 왕 앞에 고개 들기 부끄러운 자들을 등용한다. 요압이 자신의 논리와 의와 정당성, 분노로 칼을 빼들면 다윗 왕은 ‘스루야의 아들’을 부르며, 이 일에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다그친다. 다윗을 위하고자 했지만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던 요압 장군은 다윗이 아끼던 자들, 다윗이 등용하고 높인 자들을 계략을 꾸며 겉으로는 정당한 명분으로 살해한다. 교살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다윗의 범죄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음에 몰아넣는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손에 있을 때, 그러니까 죽이는 일이 아닌 살리는 일을 할 때 요압은 빼든 칼을 집어넣어야 했다. 요압은 ‘은혜’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죽어야 마땅한 자를 존귀케 하는 다윗의 태도에는 답답함과 짜증까지 일었다. 그리고 두려움과 억울함까지 생겼다. 이러다가 나의 위치는? 나는 왜 공을 세우고도, 이렇게 노력했어도 인정받지 못하지? 요압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내가 너와 약속한 것을 줄 뿐이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네 은혜가 족하다.” 딱 이만큼까지가 그에게 허락된 은혜였다. 그래도 이미 대장군이었다.
행위로 높은 자리를 사려고 한 요압의 의는 왕이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아름답게 지어졌지만 더럽혀진 옷이었다. 돌아보면 요압은 다윗의 살리는 일, 즉 선을 행하는 데에는 둔했지만 죽이는 일, 곧 악을 행하는 데에는 발이 빨랐다. 그가 다윗 왕을 위하여 무수한 업적을 이룩했음에도 악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게다가 요압이 자신의 현 위치 이상으로 올라가서 많은 힘과 따르는 자들을 거느린다면, 그는 필히 반역했을 것이다. 이미 교묘하게 다윗의 사람들을 하나둘 살해한 것 자체가 반역의 징조였다. 그에게는 각자의 사건에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다윗과는 달리 그는 ‘비은혜적’이었다. 그는 그의 판단으로 ‘다윗을 위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불러왔지만, 다시 ‘다윗을 위해’ 다윗이 살려두자고 했던 압살롬을 죽였다. ‘아버지의 마음’이 없는 자이며, 뱀 같이 지혜로우나 비둘기 같이 순결하지 못하고 뱀 같이 사악한 자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이 잘 어울릴 것이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의 30 용사에 들어가지 못했다. 사무엘하나 역대상에 기록된 다윗의 30 용사의 공통점을 보면, 이들은 다윗의 선을 이해하고 다윗의 말에 목숨을 걸어 충성을 다한 자들이었다. 스스로 높아지기 위한 계략을 쓰지 않았고, 그래서 아군과 동료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았다. 다윗의 의중을 헤아려 그와 일치된 마음을 가졌고, 그의 손과 발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원수를 멸하는 데에도 골리앗과 맞섰던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여 무공을 세우는데, 소년 다윗의 때와 비슷한 일들을 겪었다. 홀로 많은 적을 이기거나, 거인을 쓰러트리는 일 등이다. 이들은 우직하고 충직하게 다윗을 따랐고 곧이곧대로 순종했다.
30 용사 중 한 사람인 불쌍한 헷 사람 우리아를 생각해보자. 요압은 이와 반대되는 인물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일했다. 그 한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탁월한 사람이 분명하지만, 왕이 원하는 사람은 30 용사와 같은 이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제사장, 박사, 학사, 교사 등이 부름받는가? 아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온 인물들은 ‘일꾼’으로서 부름받는다.
일꾼은 자기 소유를 가지고 자신이 경영하여 자기 이익을 내는 자가 아니다. 주인의 것을 받아 주인의 뜻에 맞게 소출을 내고 일하여 주인으로부터 삯을 받는 자다. 일꾼에게 요구되는 성품은 30 용사와 같은 헌신, 충성, 황소 같은 우직함이다. 일꾼이 일을 못해도, 다시 말해 일하는 것 자체가 힘든 백수라도 주인과 함께하면 자연히 열매를 맺는다. 은혜인 것이다.
30 용사는 은혜받은 자,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모든 족속과 열방의 찬양대를 예표하기도 한다. 이들의 출신지를 보자. 다윗의 친척만 아니라 외국인, 북쪽 지파, 사울의 동네에서도 다윗 왕을 위해 자신을 던진 자들이 나왔다.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우두머리는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윗을 힘껏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그를 세워 왕으로 삼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대로 함이었더라.”(대상 11:10) 예수 우리 왕 그를 위하여.
먼저 일하러 온 자들, 요압, 그리고 사탄은 이 같은 경우를 용납할 수 없어서 분을 냈다.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은 공평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의 것을 연약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걸 본 적 있는가? 되려 더 가지려 하고, 빼앗고, 속이고, 죽이고, 위로 올라가려 하고, 다스리려 하는 것이 이들의 사악한 특성이다.
이 정리 안 된 글을 읽고 돌아보라. 나는,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끼시는 사람인가? 하나님께 나의 능력과 힘을 내려놓고 약함을 겸손히 인정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강하신 하나님께서 힘이 되신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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