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묵상해온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에 더하여, 오늘은 안식일 규례를 ‘소망’의 관점으로 깨닫는 바가 있었다.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날에 일하고, 안식일에는 안식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안식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라고 하신 것이고, 인간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기를 보시는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행하심을 닮아 행하는 것이다.
이는 안식일에 안식하라는 의미와 함께, 반대 급부적으로 나머지 날들에는 열심히 일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정도로 열심을 내셨기에. 그분은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마지막 창조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을 흙으로 빚어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 이 일에 하나님 당신을 주시고, 생명 없는 것으로 호흡하고 말하고 보고 걷게 하셨다.
우리가 열심을 내어 안식하기까지 일해야 할 것도 바로 이런 하나님을 따르는 길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따라 문화 변혁과 문화재 창조가로서의 부르심에 응하고, 파괴되고 타락하고 오염된 창조 세계를 본래의 모양과 목적대로 복구하는 것이 그 첫 번째이며, 둘째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데에 전력하여 나 자신을 한 알의 죽은 밀로 이 땅에 하늘 생명의 씨로 심고(요 12:24),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요 15:13)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일이며, 주 예수께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신 것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참된 안식을 소망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일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다가오는 휴일을 바란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늘의 일을 하는 자는 하늘에서의 안식을 바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께서 우리를 주를 위하여 지으셨으니,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안식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이 땅에서 열심을 내겠다는 의미와, 자신의 안식은 그 나라에만 있고 또 그곳에만 두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고백이라고 본다. 우리의 진정한 안식은 하늘에만 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에는 하나님을 예배만 했는데, 이는 참된 안식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고백한다.
이는 또한 이 땅의 것을 위해 노동하거나, 물건을 예배하는 것에는 안식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안식의 예배는 일하던 손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손으로만 돌려야 한다. 마음이 밭에 가 있지 않고 하늘에 있음으로써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겠다는 신앙 고백이기도 하다(반대로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은 믿음을 포기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신뢰 게임’을 떠올려 보자. 이렇게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야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요 14:27)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안식이다.
우리의 안식은, 구약 시대에 예표된 대로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이 땅에서 하나님 계신 하늘을 소망하는 것도, 지친 삶을 두고 쉬기 위해서이다. 우리 안식의 최종적 성취는 당연히 요한계시록에 나타나 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예배가 완성된다. 예배와 찬양과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이 말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한다는 의미이다. 구약의 예배 이상으로, 누구도 깨트리려 하지 않고 깨트리려고 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아 넘볼 수도 없는(지금도 사단은 예배를 깨트리려고 열심을 내고 있다) ‘예배의 상태’, 연합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취한다. 신국원 교수님의 『니고데모의 안경』(IVP)에서는 이 천성에서도 노동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이 땅에서처럼 고달프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땅에서 생명을 다해 하늘의 일을 하며, 안식을 바란다.
이 땅에서 영원히 유지되는 안식이 나타난 예를 성경에서 찾자면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 교회다. 여기서는 날마다 예배하였다. 물론 지상의 교회이기에 아름다운 모습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날마다 예배할 수 있던 건, 유대인들이 후일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예수의 도를 따르는 이들, ‘나사렛 이단’의 무리를 유대교에서 출교하여 모든 정치‧경제‧사회‧문화 활동의 권리를 박탈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예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물자를 나누는 아름다운 모습도, 시장에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게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바울 사도가 늘상 다른 교회들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요청했다.
안식이라는 주제에서는 벗어나겠지만,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더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 야고보 등 예수께서 육체로 지상에 계실 때 제자와 가족 등이 지도자로 있었고, 최초의 신약 교회였기에 다른 교회들에 비하여 정통성과 권위가 있었다. 나쁘게 보면 돈 없고 힘 없지만 경력 있는 할아버지 궁상이요, 좋게 보면 재물에 교회가 좌우되지 않는, 맘몬의 영향력이 없는 예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셔도 타락하여 썩어질 육체를 가진 인간들의 모임인지라 늘 재정적으로 위태로운 채로 명맥을 이어가야 했다(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겪었고). 지상 명령을 이루시기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 있기만 하고 선교할 생각이 없자, 스데반 집사 순교 사건 등을 통하여 다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다른 지방으로 가게 하여 그곳에서 예배를 세우게 하셨다.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드러난 예 말고 다른 ‘예배’와 ‘안식’의 예를 찾자면 변화산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에는 다양한 의미들이 있지만 글의 주제로만 따져보자면, 베드로는 이 날 안식을 경험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임하시고, 하늘에서 믿음으로 ‘살아있는’(히 11장) 이들을 만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자, 베드로는 아예 여기서 눌러앉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베드로에게 이 산을 내려가자고 하신다. 산을 내려가자 우리가 살려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 막 14:7, 요 12:8)고 하셨다.
훗날 베드로는 이 땅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감당하며, 그 예수께서 계신 하늘의 안식과 안식의 주이신 예수님을 사무치게 사모하게 되었다. 안식을 사모할수록 이 땅에서 더욱 열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과 기도도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따르자. 그리고 진정한 안식의 완성, 즉 요한계시록의 성취를 바라며 기도하고 헌신하자.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주기도에서 이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마 6:11-15 및 그 이하)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 하셨고 하시는 일을 이 땅에서 열심히 생명 다해 하라는 것이다. 그중 하나를 들어보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마 6:12)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와 이어진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나누신 십자가에서 하셨다. 그렇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저야 한다는 것에 이런 의미도 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다고 한다. 이 말을 변용해보자. 십자가 없는 안식은 없다. 이 땅에서는 자원과 남의 노력을 소진하며 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자들이 안식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마 19:23).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구약 선지서들을 생각해보자. 팍스 로마나를 생각해보자. 현대사의 나치 독일과 사회주의 정권을 생각해보자.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자가 없다. 즉 살리는 자, 의인이 없다. 오히려 이들을 부려 귀족들은 부유하고 평안하며, 재판관은 뇌물을 받아 판결을 굽게 하여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안을 조장하고, 칼 잡은 자는 공포 정치로 아무 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하여 평안을 만들었다. 진실과 상처와 억울함을 가린 거짓 평안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아닌 인간들이 만들어낸 위조 평안, 모조품 평안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비은혜적 거짓 평안을 구가하려던 세력을, 고통받는 백성들을 깔고 앉아 만든 허위 평안을 증오하신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그래서 이들을 반드시 무너트리신다. 이미 그러했던 이스라엘과 유다를 그리하셨고, 열방에도 그리하셨다(슥 1:7-21).
이러한 거짓 평안이 압제할 때일수록 우리는 진정한 평안의 복음 전하길 더욱 힘쓰며(엡 6:15), 안식을 바란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때에 안식을 이룰 것이다(슥 1:16-17). 지금은 성도의 인내(계 13:10, 계 14:12)가 필요한 때다. 안식을 위하여.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사역 후원 및 자율 헌금: 하나은행 748-910034-87207
↓ ♡와 [구독하기]를 눌러주세요
구독이 안 될 때는?
1. https://parkhagit.tistory.com/ 주소로 접속해서 [구독하기] 클릭!
2. 카카오톡으로 로그인 + 티스토리 가입을 [확인] 두 번 클릭으로 단숨에 끝내기!
3. 다시 [구독하기] 클릭!
4. [구독 중] 뜨면 구독 완료!
(https://parkhagit.com/ 주소에서는 구독이 되지 않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군대묵상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9.12.20. 폴 리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IVP)을 읽다가 4 + 기도 → 부흥 → 선교 사이클 2 (3) | 2025.08.07 |
---|---|
2009.12.20. 예수 그리스도 (0) | 2025.02.13 |
2009.12.19. 각인 (0) | 2025.02.11 |
2009.12.12.? 예배란 무엇인가 (0) | 2025.02.04 |
2009.12.19.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자들의 극단 (0) | 2025.0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