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09.11.15.(일)
정리: 2024.07.22.(월)
마태복음 26:6-1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개역한글)
나의 묵상: 예배 is
전에 이정원 목사님으로부터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결국은 ‘예배’를 의미한다는 것을 배웠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가 행한 일을 말하여 그녀를 기념하라고 한 것은, 마리아의 행위가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져 높임 받은 것도 있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예배를 세우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통상적으로, 본문은 ‘헌신’이 주제로 알려져 있다. 나는 이정원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은 어느 날 묵상을 하다가, “예배는 헌신(獻身)이다”, “예배는 헌심(獻心)이다”라는 명제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리아가 향유를 모은 옥합은 본디 혼례를 치르고 혼수품을 구매하기 위해 여자가 소녀 시절부터 알뜰하게 차곡차곡 모은 자금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것을 그분의 머리에 부어 발끝까지 흐르게 했다.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전부. 예수께서는 자신을 아낌없이 깨트려 드린 마리아의 사랑을 받으셨다. 그래서 또 다른 명제가 솟아 나왔다. “예배는 사랑이다”, “예배는 결혼식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10절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말은 곧 “사랑을 훼방하지 말라”,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예배를 훼방하지 말라”, “예배를 방해하지 말라”와 같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야망 성취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마리아는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주장한 구제나 이스라엘 재건 같은 대의보다 당신을 향한 작은 이의 사랑을 크게 보시고, 크게 받으셨다. “……저가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사랑의 향기는 그곳이 가득했다. 제사장‧선지자‧왕에게 기름을 부을 때 보통 약식으로 귀한 향유를 손바닥으로 찍어 정수리에 안수한다. 그렇게만 해도 향기가 짙다. 그런데 대제사장 아론의 경우 뿔에 기름을 채워 머리에 부음 받았다.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흐를 정도라고 했다(시 133:2). 이보다도 더하게 예수께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 부음을 받았다. 머리에 부었다는 마가복음 14장과 발에 부었다는 요한복음 12장을 종합할 때 나오는 그림이다.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슬픈지!
안타깝게도 마리아의 사랑 고백은 동시에 그분의 장례를 예고하기도 했다. 본디 향유의 쓰임이 그렇다. 향유는 시신의 악취와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시신에 발랐던 것이다.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니고데모가 재산을 털어 사온 것이 바로 이를 위한 향품이었다(요 19:38-40).
마리아는 향유를 다 쏟아부었음에도 거기에 눈물을 더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을 것을 말씀하시자 당황하고, 누가 더 크냐 다투고, 자신의 야망이 위협받자 그분의 뜻마저 가로막아 사탄의 일에 협조까지 했지만, 이 여인은 예수님의 곁에서 그분이 가시는 걸음을 함께했다. 사랑을 고백하고, 장사(葬事)를 예비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제자들은 흩어져서 도망갔지만, 이 마리아는 십자가까지 따라갔고 장례에도 함께했으며, 부활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고 전했다. 베드로는 겨우 부활한 주님을 여러 차례 만나고야 사랑을 고백했다. 주와 함께 죽겠다던 자기 열정이 비워진 입술로.
마리아의 사랑이 더욱 안타까운 건 본문 다음에 오는 두세 구절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파는 값으로 은 삼십을 받았다. 이는 노예 한 사람 몸값이며, 120데나리온과도 같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부은 향유가 300 데나리온 이상이라고 값을 매겼었다. 그런데 그 반도 안 되는 값으로 스승을 판 것이다. 여기에는…… 사랑이 없다. 나머지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사랑으로 다시 나아왔지만, 철저히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탄에게 붙잡힌 가룟 유다는 파멸하고 말았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께서 기념할 만한 사람인가? 그분이 기념하는 기준이 일의 성취와 대의명분에 있지 않고 그분을 향한 사랑에 있음을 받아들이는가? 베드로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시며 베드로에게는 세 번을 물으신다. 이런저런 말로 대답을 회피하던 그는 결국 주님의 끈질긴 사랑을 ‘받아들인다.’ 요즘 주님과의 관계가 소원한가? 일은 밀어붙이는데 나만 열심 내는 것 같고 하나님을 따라와 주지 않는 것 같은가? 자기 자신과 순서를 돌아보자. 그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오늘, 주님께 사랑한다고 말하자.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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