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룟 유다 딜레마
가룟 유다는 성경에서 여러 사람과 대비된다. 가장 귀한 것을 깨트려 향유를 예수께 바친 베다니 마리아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함께 그 이름이 전해지는 영광을 얻었다. 반면 가룟 유다는 이를 아까워하며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으리라고 한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가룟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재정을 맡은 그가 횡령하던 사람이기에 이를 아까워했다고 지적한다. 유다는 이러한 탐심으로 예수님까지 팔아 넘겼다. 책은 유다의 탐심에 집중하여 정작 더 중요한 가치를 못 본 것은 마리아가 아니라 유다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유다의 모습에서 또 한 가지 볼 수 있는 측면은 위선이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가리기 위해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웠다.
위선의 모양은 실제의 선과 함께 이루어지기도 한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분이라 조심스럽지만, 유다도 향유를 판 돈의 상당액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에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자신의 몫으로 따로 떼었을 터.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 것 자체는 사실이니 이로써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명분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반의 사실은 절반의 거짓이기도 하다. 이러한 위선과 위장은 자신의 것을 뒤로 챙기려는 마음으로, 아간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온 부자 청년을 어여삐 보시면서 한 가지 부족한 것만 하면 된다고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를 곁에서 듣고 있던 유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친히 떡을 찍어 건네셨음에도 예수님의 대적자들을 찾아간 배은망덕한 가룟 유다가, 친교의 표시인 입맞춤을 예수님을 체포하는 구호로 삼은 가룟 유다가, 부자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처럼 베다니 마리아를 책망한 것이라면 더욱 나쁘다.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가져다 쓴 것이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와 대비되는 다른 사람은 단연 베드로다. 베드로는 함께 지내온 예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존 스토트가 ‘천국의 사냥개’라 부른 예수님이 포기하지 않고 여러 번 베드로를 찾아왔고, 결국 베드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란 예수님의 질문에 이미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예수님이 주시는 용서와 회복의 기회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죽음의 위협과 감옥에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증거하는 사도가 되나, 훗날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다 후배 사도인 바울에게 공개 책망을 받기도 한다.
예수님을 돈으로 판 가룟 유다의 경우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심한 죄책에 시달렸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이 찾아올 자신을 지킨 것과는 달리, 그는 예수님에게 용서하실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가룟 유다가 원체 탐심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선택은 베드로와 대비되며 안타까움을 더하는데, 마지막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강도와도 대비된다. 그 강도는 자신이 마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고, 예수님이 무죄하다고 반대편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변호에 나섰다. 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할 때 그 강도 역시 십자가 위에서 초반에는 예수님을 힐난했으나, 죽어가던 중에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 끝까지 죄인으로 죽을 뻔했지만 끝의 끝에서 자신의 죄인 됨과 예수님을 위해 나선 그는, 공식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간 첫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지상에서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했지만, 끝에서 결국엔 던져버릴 무가치한 것에 예수님을 팔았고, 끝의 끝에서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고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를 부러워하는 부자와 함께 고통 받기를 택했다.
저자는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그가 “이 무슨 낭비인가!”나 “이 얼마나 악한 낭비인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2천 년이 지났을 즈음, 그리스도를 따르고 전하려 한 미국의 짐 엘리엇 선교사 일행은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에게 다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당한다. 「라이프」 지를 비롯한 언론과 사람들은 “이 무슨 낭비인가!”라며 유능한 젊은이들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들이 살아서 미국에 있었다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라며.
하지만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등은 예수님의 용서를 가지고 에콰도르로 향했고, 시간이 지나 아우카 족은 복음화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쓴 기자에게 짐이 대학 시절 쓴 일기장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바보가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과거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이 글을 보며 이렇게 적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얻고자 영원한 것을 버리는 자는 엄청난 바보다.” 가룟 유다의 선택이 그랬다.
대제사장 무리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에도 탐심 문제가 있었다. 책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명절 때 로마 곳곳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본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 제사를 지냈다. 여행길에 제물로 쓸 동물들이 상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리고 제물로 흠 없는 동물을 바쳐야 했기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동물을 사서 제사를 드리고 성전세를 바쳤다. 성전세는 내부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따로 있었기에 환전을 필요로 했다.
이때 대제사장 일파는 성전 내 이방인의 뜰을 동물을 파는 상인들과 돈 바꿔 주는 환전상들에게 내주었다. 대제사장 무리는 사마리아인을 비롯, 비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막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남들도 못 들어가게 막는 무리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받고 명절 때마다 ‘한몫 땡기고’ 있었다. 예수님이 채찍을 휘둘러 상인들을 내쫓고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니, 대제사장 무리로서는 그들의 권위와 자존심에 심각한 해를 받은 셈이며 막대한 돈줄이 끊긴 것이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며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이들의 위선은 예수님의 등장에 권위와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권위와 지위, 그리고 권위와 지위의 이름에 덮인 체면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예수님을 묻어버리기로 했다. 이는 본디오 빌라도에게도 교집합적으로 적용된다.
책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외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인물과 집단으로 본디오 빌라도, 대제사장과 이스라엘인들, 가룟 유다를 짚었는데,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암 2:6)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체면, 지위, 돈, 또는 그 무엇이든 자신의 실체가 폭로될 때 회개하기보다 도리어 폭로한 의인을 죽이려 하고, 또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경우가 이들에게 드러난다. 인간의 모든 죄의 양상이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모든 죄를 졌다.
그런데 이익을 보호하려고 의인을 제거하며 돈에 의를 굽히는 죄와 악의 양상은 오늘날에도 일어난다. 대천덕 신부는 미국에서 활동할 때 어느 기업 집단의 문제를 고발했는데, 그러자 위장 교통사고로 죽을 뻔했다. 기업 집단이 이익을 보호하고자 고발자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1989년 일본 후쿠시마에서는 남자 청년이 여자 화장실 정화조에 몸이 끼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는데, 경찰에서는 용변 보는 여성을 보려고 하다가 죽었다고 발표했으나, 이 청년이 근무하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의 결함을 폭로하려다 의문사를 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수긍하고 있다.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은 회사 오너 일가의 갑질에 희생당한 뒤 회사의 갑질과 불합리를 폭로하며 맞섰으나, 사측은 물론 동료들의 외면 속에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를 겪었다. 그는 정의의 필요성을 느껴 정치적으로 풀고자 정당 활동을 했으나, 당은 그를 (중략) 대외 이미지로 이용하고 내부적으로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씨스피라시>에서는 해양 오염을 일으키는 바다 쓰레기와 해양 생물 멸종의 주원인으로 무리한 어업을 지목한다. 폐그물과 밧줄이 해양 폐기물의 절반을 차지하는데도, 환경 단체들은 어업 회사의 후원을 받기 때문에 입을 다무는 대신 해양 폐기물의 0.03%인 플라스틱 빨대를 부각시킨다. 어선에 탑승하여 어획 현황을 감시하는 옵저버들은 의문의 해양 실종을 겪거나 살해 위협을 받았다. 바다에서 죽으면 누군가 양심 고백을 하기 전엔 모든 진실이 가라앉는다.
이러한 거악들은 죄에 죄를 더하고 악에 악을 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실을 가리거나, 진실이 드러나면 적반하장으로 나선다.
유튜브 활동을 하다 2021년 SBS <집사부일체>, 채널A <강철부대> 등 예능에 출연한 특전사 707부대 예비역 박 모 중사는 얼마 전 MBC <실화탐사대>에서 그 실체가 폭로되었다. 두 아이의 아빠라는 그는 여러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며 소위 ‘초대남’을 부르기 위해 여성의 사진을 찍어 유포해왔고, 707 부대에 합격하기 위해 인성 문제가 중요하다던 그는 은행 ATM 3대를 동시에 쓰다가 한 시민이 문제를 제기하자 욕설과 협박, 폭행을 자행했다. 자신도 어렵게 살아서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찾아오라고 했던 그는 학창 시절 장애를 가진 학우와 약한 친구들을 폭행하고 모욕해왔다. 불법 대부업과 도박 사이트 운영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실화탐사대> 방송 3일 뒤인 4월 20일에 가시 철선을 감은 몽둥이 사진을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다”라는 글과 함께 올리며 4월 26일에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일말의 사과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동안 검찰, 조계종, 만민중앙교회, 김기덕 영화감독 등도 자신의 실체가 폭로될 위기에 처하자 MBC <PD 수첩>에 방송금지가처분신청을 내왔고, 작년 7월 <실화탐사대>에서 대중에 알려진 사이비 종교 천상지천에서는 역시 그 실체를 알린 유튜브 채널 문종합니다 진행자를 허위사실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부끄러움이나 반성은 전혀 없고 방송이 악의적이고 조작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신천지 역시 <PD 수첩>이 자신들의 반론을 실어준 것을 정정 보도라고 허위 주장을 하기까지 하니.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삶에 채우며 십자가를 지겠다고 할 때, 어쩌면 의의 편에 서려는 우리 앞에 이러한 악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처럼 억울한 희생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야 하는 길이다.
우리를 더 긴장하게 하는 건, 사실 본디오 빌라도의 모습이, 대제사장과 이스라엘인들의 모습이, 가룟 유다의 모습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루의 삶만 보아도, 얼마나 헛되고 무가치하며 심지어 해로운 것을 위해 예수님과 맞바꾸었는가. 로마 군병들처럼 몰라서 저지른 게 아니라 빌라도처럼 알면서 예수님을 인식 밖으로 밀어내어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고 탄식하시는 것에 집중한 적은 또 얼마나 많은가. 또 내 이중성과 위선의 실체가 드러나는 건 얼마나 두려운가.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베드로처럼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런 나마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팔을 벌리시고 포용하셨다. 그 사랑은 사울을 사도 바울로 변화시켰고, 교회를 세우셨다. 교회는 부끄러움 가득한 서로를 용납하고 예수님께 맡겨드린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 자기를 부인하라 하신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셨지만, 죄인 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
그렇게 진 십자가는 무겁지만 또 가볍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 같지만, 예수께서 당신이 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혼자 질 수 없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광을 받을 것이다. 마음속에서 죄와 싸우는 것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거악과 싸우는 것에서도. 죄된 자신을 부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나 짐 엘리엇 같은 실제적 위협 앞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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