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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성정이 같은 악인과 의인 | 그리스도의 십자가(4)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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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도 악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

본디오 빌라도는 비겁하고 비열했다.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위해 온갖 타협을 시도했지만 결국 굴복한 사람이었다. 로마 황제 앞 자신의 입장과 눈앞의 폭동 직전 유대 군중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비겁했기 때문에 타협하고 말았다.

저자는 여러 쪽에 걸쳐 빌라도의 인물됨과 그가 비겁한 이유를 자세히 적는다. 그리고 빌라도에 대한 정죄가 정점에 오르자, “그와 똑같이 도리에 어긋난 우리 자신의 행동은 간과하기 쉽다”고 화살을 우리에게 돌린다. 스토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며 배반하는 동기를 얼음 송곳이 위장을 찌르듯 서늘하리만치 서술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처럼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겠다고,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실상은 날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하루 일곱 번씩 일흔 번을 그리 한다. 그것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상황이 그랬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또는 누군가가 죽거나 다친다고, 나와 가까이에 자리한 권위 있는 사람의 눈 밖에 나면 나는 괴롭힘을 당하거나 거리에 나 앉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그렇게 보니 믿음 생활이라는 건 참으로 치열한 싸움이라는 걸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한다는 건 좁고 협착한 길이라는 것도. 의를 위하여 타협하지 않을 때 다가올 불이익과 고통은 눈에 보이고 현실적이고 거대해 보인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냥 한 번 신상에 절하면 되는 걸 마다하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나눔 중에 주기철 목사님 이야기가 나왔다. 그분은 교단이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받아들이인 것에 반대했고, 일제와 교단 양측으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다. 교단은 그를 교회에서 쫓아내고 사택을 몰수하고 쌀을 끊었다. 일제는 그에게 못이 줄지어 박힌 길을 맨발로 걷도록 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엔 일본의 대박해 사건인 후미에를 다룬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모아놓고, 신앙을 부인하며 동판에 새긴 예수님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고, 그 앞에서 돌아서면 처형하는 걸로 유명한 박해다. 이때 많은 이들이 동판을 밟고 지나갔고, 닳고 닳은 동판은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작품 『침묵』에서는 동판을 밟는 것이 배교가 아닌 것처럼 묘사하였다. 물론 작품을 깊이 들어가면 다양한 층위로 해석이 필요하지만.

후미에 사건이나 주기철 목사님에 대한 핍박, 그리고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박해와 유혹들은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늘 우리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한다. 이유와 명분은 들으면 고개를 끄덕일 정도다. 크게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한 번만 눈 감으라는 요청일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핍박이 더 거세질 거라고, 성도들을 지켜야 하지 않냐고, 하나님도 그건 원하지 않을 거라고 등등.

그렇게 따진다면 가룟 유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히브리서에 녹명된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지만, 연단된 후에 나타나는 삶의 모습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가 분명했다. 예수님은 이에서 지나는 것은, 다시 말해 이 핑계 저 핑계로 타협하는 것은 악이라고 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왼뺨을 맞는 박해에 오른뺨마저 돌려 대라고까지 말씀하셨다.

핍박뿐 아니라 유혹에 있어서도 타협의 명분은 다양하다. 핍박이든 유혹이든, 사회적 상식에 부합하고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에 수긍하기를 거부하고, 마음을 지키는 게 신앙이라는 걸 되새겨본다. 예수님은 때가 오자 피할 수 있는 체포를 당하셨고, 지지 않아도 되는 억울한 십자가를 지셨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지고 따르라 하신 십자가를 질 수 없다. 버겁고 무겁고 불편하고 괴롭다. 그래서 절망한다. 그리고 내 존재의 절망에서 다시 예수님이 하나 남은 소망이라는 걸 발견한다. 나는 할 수 없으니, 주께 나를 맡긴다.

그렇게 십자가 뒤의 영광을 눈에 보이는 현실의 위협보다 가까이 믿으며 예수님을 소망하자, 질 수 없고 지기 싫던 십자가를 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타협의 무궁무진한 논리들보다 훨씬 지혜로웠다는 것이, 심지어 은혜라는 것이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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