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즐거워하며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고난 받고 죽기 위해 살아가셨다. 그분의 죽음을 향한 발걸음은 맹목적이기까지 했다. 피할 수도 없고, 피하지도 않고, 의지적으로 가신 길이었다.
모임 전날은 이단의 고소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 다음날인 오늘, 아침부터 심각한 우울 증세가 오랜만에 찾아와 끊었던 약을 먹었다. 그것도 아침 약뿐 아니라 웬만해선 손을 안 대는 점심 약까지. 그럼에도 마음의 갑갑함은 좀체 가시질 않았다.
오후에 간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신체적 통증에 집중하니, 기이하게도, 어쩌면 당연하게도 마음의 문제는 좀 가라앉았다. 허리를 활처럼 꺾은 자세로 있던 15분은 좀이 쑤시고 견디기 힘든 자리였다.
집에 돌아와 모임 전에 다른 책들을 훑어보며 생각을 다시금 다잡았다. 내가 짊어지려고 하니 힘든 거였구나. 무능하고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전능하시고 선하시며 삶을 붙드시는 하나님께 맡기는 거지. 그분은 또 피할 길을 내시지.
본격적으로 북클럽을 하면서 책을 읽는데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기독학생연합의 장으로서 학기 시작 전 겨울 방학 동안 연합 밖의 몇몇 모임과 접촉했는데, 어느 날 하루 동안 두 곳으로부터 한꺼번에 거절을 받은 날이었다. 그 날 한 교회의 찬양 집회에서 기도하며 받은 큰 위로는, 내가 거절 받는 그 때에 2천 년 전에 무수히 거절 받으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그 분과.
마찬가지로 이단의 고소로 힘겨워하는 이 시간도, 2천 년 전 고난 받으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들이라는 인식의 적용이 일어났다. 물론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그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기까지 했다. 고난 받고 심지어 죽을 걸 알면서도 따르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고소‧고발 등으로 시달리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 “나는 못하니, 주께서 해달라”는 항복 선언으로 돌아온다. 부끄럽게도 의료 기구에 단 15분도 못 누워있는 내가 감히 장차 올 영광을 위하여 한 나절이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희생을 어찌 따를 수 있으며, 그 희생에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철저하게 나의 무력함을 늘어놓고 하나님의 전능함에 맡기며, 샘처럼 눈물이 터질까봐 기도 한 마디 한 마디 사이에 오랜 침묵을 눌러 넣는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니, 이 또한 은혜와 위로와 감동이다. 언젠가 나도 그 영광을 바라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선포하려, 오늘을 또 죽지 않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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