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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3:16-23 | 바울이 말하는 지혜의 기준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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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09.20.(금) + 2024.09.22.(일)
정리: 2024.09.22.(일)


고린도전서 3:16-23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바울이 말하는 지혜의 기준

스스로 지혜 있다 여기는 사람은 망신을 당하나, 자신을 부족하다 여겨 배우고자 하는 겸손한 사람은 지혜를 얻는다. 잔치에서 스스로 상석에 앉는 사람은 원래 배정된 나중 자리로 얼굴이 빨개져 물러나게 되나, 스스로 말석에 자리한 사람은 주최자가 알아보고 상석으로 올린다(눅 14:7-11, 잠 25:7). 그러니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마 20:25-28, 막 10:42-45).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빌 2:3).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다툼은 각자가 스스로 지혜 있다 여기고 형제자매의 위에 올라서려 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의 파벌 중에 니골라파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 문제는 없는 듯하나, 어쩌면 이들은 상대 교파를 이단시하여 몰아내려고 했었던 듯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이어 고린도교회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령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일깨운다. 하나로 연합한 성전은 나누지 못한다. 형제자매를 적에게처럼 공격하여 우위를 점하려 하고 내보내려 하는 것은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즉 교만하고 분열하여 다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까지 엄중히 말한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성도들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 거룩은 구별됐다는 의미다. 각자가 잘났다고 주장하는 시대에, 교회는 자신을 낮춰 서로 섬기고 사랑하여 연합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또한 바울은 3장 전반부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불렀듯이, 이번에는 교인들의 이름난 지혜를 하나님의 지혜와 비견될 수 없는 ‘이 세상 지혜’라고 깎아내린다(?). 어째서? 고린도 성도들은 변증과 수사학에 능했고 전도의 열매도 많았다. 신학을 발전시키고 성경 지식도 해박했다. 그런데 이 세상 지혜라니?

바울이 볼 때 아무리 언변에 능하고 성경을 달달 외워도, 이로써 신학 파벌을 형성하고 다른 파벌들을 대적하는 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 각자가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베드로)파니 심지어 그리스도파라고 해서 자신들이 따르는 스승과 신학 전통을 내세우며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라, 힐렐에 이은 바리새파 3대 ‘랍반’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바울은 누구보다 학문적 성취가 뛰어났지만 자신의 학벌을 자랑하지 않았다. 복음을 알고 전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학벌쯤은 배설물로 여겼다.

바울에게 내세우고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다.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 출신 학교, 소속 교단, 경험, 업적과 성취, 다니는 기업 등을 ‘간판’이나 ‘영광’으로 자랑하는 건 ‘이 세상 지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 자신을 부족하다 여기는 정도를 넘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바울은 모든 것인 그리스도를 얻었다(빌 3:3-9).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자랑하여 자신을 높이고 남 위에 서려는 것은 어리석음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다. 훌륭한 목회자나 신학 교수라 하더라도 다 한 성전의 지체일 뿐이지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사랑의교회가 서울 서초 예배당에 있을 때 사역차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장로였는지 누군가를 소개받아 인사를 나눴는데, 그 신사는 옥한흠 목사님께 직접 제자 훈련을 받은 몇 기 생이라고 자부심에 찬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속에서는 ‘그게 뭐 어쨌다고?’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리고 안타까웠다. 옥 목사님이야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목회자지만, 그에게 제자 훈련을 받은 이 장로님은 ‘장자교단’에 속한 ‘사랑의교회’의 ‘옥한흠’ 목사님을 브랜드화하여 자신을 포장하는 데 썼다. ‘이 분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 목사님이 살아서 이 분이 처음 만나는 다른 교회 성도에게 자기 소개하는 모습을 봤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제자 훈련이 실패했다며 상심하지 않았을까?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바울파를 보는 기분도 그랬을 것이다.

하물며 비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떨까. 전에 한 기업 회장님과 통화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대뜸 내게 무술이 몇 단이냐고 물었다. 싸움 잘하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술 경력을 나열했다. 60대 노인이 과거 이력으로 젊은이를 힘으로 이기려는 듯해서 이게 뭔가 싶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메신저 프로필을 보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 거라고 했다. 사진에는 세 명이 있었는데, 주인공 양 옆에 국무총리와 정복을 입은 군인이 있었다. 합참의장이 친구라고 했다. 합참의장은 누군지 몰랐지만, 국무총리는 무능해서 식물 총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가, 나설 때는 고집을 부리며 국민과 싸워 악명으로 유명세를 넓혀가는 국무총리였다. 아무튼 두 고위직 사이에서 사진을 찍고, 그들의 지인이라고 해서 그 ‘급’에 해당하는 사람이 되는 건가? 나도 대학 때 활동하며 유력 정당의 당 대표와 대학 총장 사이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도 그 정도 인물이 되는 건가?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정체성을 그런 것에서 갈구하지 않는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은 자신을 나타내거나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보여준다. 노년기 남자들의 프로필 사진은 대개 산 정상에서 자신을 찍은 사진이거나, 가족 사진이 대부분이다. 가족보다 고위 인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그 사진으로 자신이 누군지 알 거라며 뽐내는 말에, 오히려 나는 그분이 안쓰러웠다. 성취와 인정을 지향하며 살아왔지만, 성공은 얻었으되 존경과 사랑은 받기 어렵겠다 싶었다.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 인생,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텐데(전 5:15, 딤전 6:7).

교만의 극치를 달리는 반사회적 인격장애 중 하나가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시즘은 자아가 비대하여 타인이 없다 하여 웅대성 자기애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실은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아가 너무나 작아서 자신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외면적인 것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바쁘다. 열등감이 심해서 우월감을 얻으려고 남을 깎아내리고 자신을 올린다. 사회적으로 높이 올라갈수록, 나르시시스트와 인격적으로 상대하고 상종하고 싶은 사람은 줄어든다.

나도 그런 적이 많다. 성적으로, 상장으로, 인맥으로, 지식으로, 소속 단체로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꾸며왔고, 믿어왔고, 포장해왔다. 비교당하기를 싫어하면서도 비교해서 이기고 싶어했다. 그래야 인정받고 사랑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마음의 그릇에 나만이 가득하고 남이 없는 나에게 다른 사람이 정을 줄 리가 만무했다.

그러다 내 그릇이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한 하나님을 만나고, 알아갔다. 내가 어떠하든지,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나는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있었다. 무한의 바다에 나를 편안히 누이니, 지극히 안전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불안이 이끄는 노력을 그쳤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아닌 나를 모든 것으로 사랑하여 당신의 모든 것인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 아들 예수가 내 것이 되고, 나도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 비교의식 자체가 사라지니 열등감도 우월감도 없다. 만족이 있을 뿐이다. 노력의 근원이 소망과 소명으로 바뀌었다.

인생의 지혜와 어리석음을 모두 겪은 솔로몬은 인생 말년에 쓴 전도서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시작하여 쭉 이어가다가, 마지막 장에서야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교훈한다. 그는 그제야 하나님께 되돌아와 알았던 것이다. 이 세상 지혜로는 알 수도 얻을 수도 없는 영원과 지극한 평안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배우기를 소망한다. 이들이 하나님을 만났다 하여도 ‘이 세상 지혜’를 따라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처럼 아등바등 살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가치를 따라야 하는지를 기초부터 가르친다. 이들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 할 지경일 정도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얽매였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그분의 성품을 더 닮아간다. 나야 한참 부족하지만,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알았든 몰랐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가까이 가는 걸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면 좋겠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잠 9:10). 내가 떠올리는 분도 그러하기를. 그리고 위에 적은 두 어른도. 그들은 나를 내려다봤지만, 나는 안쓰럽게 그들을 보았다. 언젠가 좋은 나라에서 같은 높이에서 눈을 마주하고 웃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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