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10.23.(수)
정리: 2024.10.23.(수)
고린도후서 2:1-1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애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다.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곡한 호소와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풍성하게 결실할 것이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의 춤이 될 것이다(시 30:11).
바울의 본을 볼 때, 내가 누군가의 기쁨이 되려면, 누군가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음 안에서 견고히 살도록 하려면, 내가 먼저 눈물의 씨를 뿌려야 한다. 나는 내가 바라는 분을 위해서 울며 기도한 적이 있나? 홀로 걱정하고 안타까워했지 하나님께 애곡하진 못했었다.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했었다.
금식을 한다면서도 정작 기도를 놓치고 있었다. 감사하게도 오늘 수요 기도회가 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눈물겨운 사랑을 구하려 한다.
그리고 돌아보면, 가족을 위한 기도에도 전심을 다하지 못해왔었다. 내게 사랑이 있나? 그럴지도 모른다. 바울은 동족을 위해 영생을 걸기까지 사랑했는데, 나는 집안 식구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기도한다. 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요일 4:16)께서 내게 사랑을 가르쳐 달라고. 남에게는 책만 읽지 말고 기도로 직접 하나님과 소통하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고는 내가 만난 하나님을 알 수 없을 거라고 하면서, 정작 내가 기도하지 않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묵상한 에스더서에서는, 에스더와 모르드개 등 위기에 처한 유다인들이 절대적인 황제의 조서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자 금식하며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택했다. 에스더가 죽기를 각오하고 용기 있게 황제에게 나아간 것도 위기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단계였지만, 그전에 에스더도 시녀들과 함께 사흘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는 제국보다 높아서 황제의 직인을 철회하게 했다. 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소통하기 원하신다. 이 땅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방법은 역시 성경과 기도다.
한편 10월 27일에 한국 교회 성도 목표 인원 200만 명이 광화문에 모여 집회를 한다고 한다. 겉으로의 형식은 예배라지만 정치 집회의 성격이 강하다. 우리 교회는 당회에서 청년부 예배를 없애고 청년들을 버스에 태워 집회에 보내기로 했단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청년들의 예배는 다른 목적에 따라 대체될 수 있는 거였나? 1‧2부 예배 대신 집회에 참석하라고 하면 큰일 날 것처럼 여길 분들이, 청년부 예배는 예배라고 여기질 않는 건가?
물론 집회 참석은 자율에 맡긴다지만, 그렇다고 1부나 2부 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예배에서 집회 참석에 대해 광고할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 교단의 교회가 온갖 이단들이 참여하고 신사도 운동가들이 횡행하는 집회에 껴서 뭘 하겠다는 걸까? 교회 문제에는 입 닫고 자정의 움직임에는 소극적이면서, 빛과 소금으로 스며들어 섬겨야 할 때, 어차피 막힐 법 제정 하나 막는다면서 대규모로 모인 교회들은 무얼 보여주고 싶은 걸까? 위세? 규모? 명성?
수요 기도회에서 기도할 때 인도자가 첫 번째 기도 제목으로 회개를 요청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점을 회개하다가, 오랫동안 한국 교회의 현실을 외면해왔던 것을 회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10.27 집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받지 않기를 애통하며 기도했다. 교회와 성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 하는데, 교회 때문에 세상에서 하나님이 비웃음당하고 교회가 망신당하지 않기를 바라며.
내게 기도의 눈물을 회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선지자의 심정으로 한 사람을 위해, 그리고 전체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소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셨으니, 애통하는 기도에 선하게 응답하셔서 위로를 주옵소서(마 5:4).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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