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누가복음 23:13-25 | 버려진 십자가와 되찾은 십자가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2. 15.
반응형

작성: 2024.02.14.(수)
정리: 2024.02.14.(수)


누가복음 23:13-25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없음)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버려진 십자가와 되찾은 십자가

어제 일은 부당하고 억울했다. 한 집안에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과 사는 것은 지옥은 아니지만 비극이다. 얼마 전 TV 드라마 <싸이코지만 괜찮아>가 유행했다지만, 싸이코는 괜찮지 않다. 싸이코 주변 사람도 괜찮지 않다.

남의 물건을 자신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훔쳐서 버리고, 모른다고 거짓말하고, 들키니까 오히려 격노하는 모습에 나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나도 화를 낸 것이다. 그가 절도죄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걸 과거 일화를 꺼내기도 했다. 놀랍게도 그는, 아니 역시 그는 그 사건을 잘못이라 여기지 않았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의 좋고 싫음이 절대 기준이고, 자신이 한 모든 것이 정당하며 심지어 위대하다고 믿는 것, 나르시시즘의 특징이다.

그는 내가 요구하지도 않은 전기 기능사 자격증 시험 대비 도서를 사다 준 적이 있었는데, 나는 화가 나서 그 책을 재활용함에 넣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는 자신이 공부하라며 사준 건데 버렸다고 격노했다. 자신이 내 십자가를 버린 것은 잘한 일이고, 어차피 읽지도 않을 책을 재활용함에 넣었다 뺐다고 눈에 불을 켜는, 전형적인 아시타비(我是他非)였다. 물론 나도 악을 악으로 갚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렇게 하면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거란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르시시스트에게는 반성적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했다.

나는 그가 보통 사람과 사고 체계가 다르다는 걸 유념하고 전문가처럼 대했어야 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사연 있는 물건에 손을 댄 것이다 보니,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내가 문제고 잘못했다고 몰아붙이니 이성과 감정을 붙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나는 프로답지 못했고, 애초에 프로가 아니었다.

어젯밤 물건을 버렸다는 아파트 화단(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못 찾도록 버린 곳과 다른 위치를 말했을 것이다)을 수색했는데 찾지 못했고, 오늘 아침에 재수색을 하는데도 (당연하게도) 못 찾았다. 화단에 있는데 마침 사건의 당사자가 귀가하고 있었다. 그는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가는데, 저 앞서 성큼성큼 가면서 나에게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논리가 막히거나 격노의 끝에 항상 하는 말이라서 위협적이지 않았다(그렇다. 그는 설득이 아니라 강요나 위협을 한다). 그렇게 먼저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고, 문이 닫히지 않게 감지기 근처에서 기다리지 않고 걷던 속도 그래도 승강기로 향했다. 현관문이 닫히고, 내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사이 그는 승강기에 탑승하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승강기 문을 닫고 올라가 버렸다. 유치하고 치졸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어제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나보다 괴롭고 억울한 처지의 한 선배가 떠올랐다. 그는 아내가 이단에 빠져 황당한 종말론을 믿고 전쟁을 피한다며 아이를 데리고 해외에 있던 이단 집단의 공동체로 떠났다. 병든 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고 최근에야 보내드렸는데, 집안에 아내와 아이가 자신을 적대하며 집을 떠난 것이다. 그 선배를 기억하며 어제 일을 겪으니, 그나마 내 마음을 지킬 수 있었다.

어제 온라인 독서 모임에서 사건을 나누자, 한 친구가 예수님의 고통을 알고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라고 위로해주었다. 외면과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2013년 초에 깨달은 것이기도 했는데, 친구를 통해서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장 억울한 판결을 받고 있다. 재판장은 무죄를 말하는데, 군중은 최흉의 처형을 하라고 외친다. 심지어 최악의 죄수를 대신 풀어달라고 한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사회를 떠들썩하고 한 범죄자와 같게, 아니 그보다 훨씬 못하게 취급하는 거짓 선동에 고혈압으로 쓰러졌을 것 같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재판장이 무죄인 걸 알면서도 십자가형을 언도한다. 단번에 끝나는 참수형도 아니고 끔찍한 고통과 둘러싼 무리로부터 받는 수치를 대응도 못하고 수 시간 동안 견뎌야 하는 형벌이다. 억울함과 분노에 이를 갈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의 대사는 없다. 빌라도와 군중의 소리만 있다. 이 억울함 속에서 그리스도는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사 53:7). 여기서 내가 취해야 할 자세를 배운다. 어제 친구가 말한 대로, 오히려 나를 위해 분노가 나를 삼키지 않도록 무대응으로 잠잠하는 것. 간디가 했던 비폭력‧무저항 운동과도 같은 맥락이다.

오늘 기도회에 늦게 들렀는데, 평소라면 끝났을 시각인데도 여전히 기도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기도회를 마칠 때라 내 기도 제목만 냈는데, 귀가하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오늘 아침에 나를 스친 생각과 같은 맥락이었다. 실은 아침에 스친 생각을 거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밤에 귀가하며 든 생각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선을 악으로 갚는 자에게,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것이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적는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17-21)

이것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였다. 그는 내 십자가 장식을 버렸지만, 주께서는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되찾아주셨다. 먼저 십자가의 본을 보이신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악을 악으로 갚고 싶은, 억울함에 화를 내는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자. 이기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