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2.12.(월)
정리: 2024.02.12.(월)
누가복음 22:14-23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오랜 기다림
태초부터 기다려온 만남이 있었다. 제자들을 주께서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몰랐다. 그리고 이 최후의 만찬을 주께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원하고 원하였는지 제자들은 알 수 없었다. 장차 일어날 일을 아시는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에 함께하신 유월절 만찬. 이후로 제자들은 식사를 하며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배반할 가룟 유다마저도 함께 식사하기를 고대하셨는데, 안타깝게도 유다는 그리스도를 기억지 않았다.
이 정갈한 만찬을 마치고 예수께서는 제자의 손에 팔리고, 제자들의 배신을 겪고, 부당한 재판과 억울한 채찍질, 그리고 십자가형을 받고 죽는다. 부활하여 남은 제자들과 생선을 구워 먹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길어야 몇 달? 하지만 죽음의 시간은 영원 같았으리라. 최후의 십자가에서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지고서, 하나님 아버지하고도 단절되어 완전한 고립과 외로움 속에 파묻히고 잠긴 고통을 상상할 수나 있을까.
그런데 요즘의 내 마음이 이렇다. 마음이 죽고 죽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 의지가 없다. 살아갈 이유와 동기를 상실한 것 같다. 영원한 죽음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아니 살아는 있는 걸까. 종일 몸도 관 속의 시신처럼 누워만 있다.
물론 비교는 불가하다. 예수께서는 숭고한 희생 속으로 들어가셨지만, 나는 정당성을 얻지 못한 추구를 하다가 튕겨 나왔다. 그래도, 아름답진 않지만 고통은 고통이다. 나는 표현을 유려하게 쓰려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직설적으로 쓸 수밖에 없다.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아니 죽은 것 같다. 도저히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일의 결말을 모르기에 소망하기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고통을 아시는 주님, 결말을 아시는 주님을 생각한다. 부활의 아침에 제자들과 재회한 것처럼, 우리가 재회하기를 바란다. 아름답고 영원하기를. 최선의 하나님께서 최선의 길로 이끄시기를.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주께 기도하여 그분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어쩌면, 아니 실은 나보다도 그분은 태초부터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고 원하신다. 영원한 죽음 같은 기다림이 아름답게 끝나기를 바란다. 그분의,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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