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08.08.19.(화)
정리: 2023.12.30.(토)
마가복음 10:1-12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지식의 장막 속 교만
오늘날 바리새인에게는 어쩌면 진부하다 싶은 꼬리표가 붙어 다닌다. 형식주의자, 율법주의자라고. 나는 여기에 더 본질적인 꼬리표를 더 붙이고자 한다. 지적 우월감을 가진 교만한 자라고.
이들에게는 오히려 이들의 높은 지적 수준이 진리를 가리는 장막이 되었다. 스스로의 세계에 갇힌 꼴이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 양반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특권을 가지고 있으며, 지적으로 뛰어났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서로 싸우거나 협력하며, 특권을 유지하거나 더 쟁취하기 위해 공부한다. 순수한 학자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덕망 있다는 그 스승의 제자들은 그 문하에 있다는 사실로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한다. 아니, 그보다는 상대 진영을 자신이 가진 진리의 지식이라는 것으로 누르고 설복하려 한다. 이 모두가 바리새인과 양반의 공통점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말과 행동이 다르거나 말의 교묘한 ‘논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그들의 죄를 밝히셨다(이는 단순 비판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 지성인이라 하는 분들의 모습에서 양반과 바리새인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이분들은 간혹 성경 대신 세상의 가르침을 들이대거나, 성경으로 성경을 대적한다. 이분들은 보통 지혜를 모으기보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이 호전성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지식 대 지식의 싸움보단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고 진리 대 지식의 싸움으로 방향 전환을 하면 좋겠다. 내가 볼 때 기독 지성인의 공유 가치는 다양성 이전에 진리 수호와 (변증 수준을 넘는) 진리의 증거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결혼관과 가정관을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과 성도, 하나님과 교회, 교회와 교회, 성도와 성도의 관계로까지 이어진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러나 기독 지성인들은 성령의 사람들과 하나 될 생각이 없고 오히려 알지도 못하는 사실로 비방하는 것 같다. 자신들이 찾아낸 지식으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지혜를 대적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반면 참된 성령의 사람은 지성인들 앞에 섰을 때 지혜의 하나님께서 때마다 지혜로운 할 말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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