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08.10.03.(금)
정리: 2024.02.17.(토)
마가복음 14:1-9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순전한 향유를 준비하자
복음서를 보면 종종 열두 제자는 모르는데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성경을 아는’ 경우가 등장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겉옷을 펴고 호산나를 외치며 영접하던 사람들, 성전의 노인들, 마리아의 이름을 가진 여인들 등.
오늘 베다니 마리아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제자들과 무리는 몰랐지만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께서 정녕 죽으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가르치실 때야 알았고, 첫 무리는 사도행전 2장에 이르러서야 알게 된다. 이들은 복음을 증거할 때 베다니 마리아의 이 일을 말하였을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어 주님의 이름과 함께 전파되는 영광을 얻었다.
어쨌거나 향유는 죽은 자를 장사할 때 쓰였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몰약과 침향을 백 근쯤 준비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시취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부자일수록 좋은 향유로 씻을 텐데, 베다니 마리아는 가난한 중에 일생 동안 모은 돈으로 이를 구입한 것 같다. 이 향유는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 드리기 위해 평생 예비한 것이다. 나는 준비되고 있는가? 향유처럼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도록, 나의 마지막을 예비하라.
본문에서 예수님은 베다니 마리아의 오늘 행한 일을 칭찬하셨다. 이 일은 예언적인 사건이었고 예표였다. 항유를 부음받으면서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왕이신 예수께서는 또한 담담하셨다. 당신의 장례를 위해서임을 알지만, 그것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유언장을 쓰는 것처럼 받아들이셨다. 이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다. 죽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알기에 도수장의 양처럼 잠잠하셨다.
나도 나의 마지막을 살면서 마지막 나날들을 맞이한다면 이와 같을 수 있을까. 오히려 예수님은 기뻐하셨던 것 같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구원할 그 기쁨을 바라며 십자가를 지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한다(히 12:2). 세례 요한도 주님이 오셔서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걸 기뻐하였다(눅 1:41, 요 3:29).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눅 10:42, 요 16:22).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한, 한 알의 밀로 ‘죽는 기쁨(요 12:24).’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죽음의 결과와 열매가 어떨지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얼마 전 장례식 때 나는 기뻐했고, 내 죽음에는 더욱더 크게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데에 무지한 자들이 있었다. 요한복음에서는 베다니 마리아를 책망한 자가 가룟 유다라고 밝히고 있지만(요 12:4-6), 비단 가룟 유다뿐이랴. 그런데 나는 이런 자들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행동파나 교회와 사회를 개혁한다고 열심을 내는 이들을 본다. 주님의 뜻은 알지 못한 채 사회와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긍휼의 눈동자를 갖췄다 하지만, 그 시선으로 사회와 교회를 본다지만, 정작 주님은 못 보는 것 같다. 주님을 먼저 예배하는 것이 회복되어야 하지만, 그분의 말씀을 즐거이 경청해야 하지만, 힘을 다하여 예배해야 하지만, 그들은 힘들 빼어 일하는 데로 돌린다. 마리아보단 마르다에 가깝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 헷갈리는 것 같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개혁가와 성경학자가 되기 이전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웨일즈 부흥 중 일어나 고백했던 한 소녀의 외침을 적어둔다. “내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과 눈물과 함께 성령께서 ‘부어지듯이’ 역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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