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1.26.(금)
정리: 2024.01.26.(금)
마가복음 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증오의 연쇄
바리새인들에게 본디 안식일의 의미는 “이방 민족의 억압에서 해방될 안식의 날에 대한 희망의 상징”(톰 라이트)이었으나, 정작 그들은 정반대로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 된다’는 기준으로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옭아맸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냐 마냐의 기준을 넘어 생명을 구하냐 마냐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안식일에 일을 하냐 마나보다 안식일이라도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게 우선하는 가치라는 걸 보편 상식적으로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안식일에 구덩이에 나귀가 빠지면 끌어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예수님이 걸리나 안 걸리나를 지켜봤지만, 오히려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이 제시한 상위 기준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는 분인지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식일 기준’에만 갇혀서 매몰된 그들에겐,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도 놀라거나 기적의 의미를 살피기는커녕 중요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기적이라는 일을 안식일에 한 것만이 중요했다.
이들의 눈이 어두워진 게 안식일 규정에 대한 맹목성 때문인지, 사람들의 지지가 자신들에게서 예수께로 옮겨가자 일어난 질시와 증오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순서야 어떻든 둘 다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았겠지만, 나중에는 증오의 이유에 안식일 규정을 갖다 붙인 꼴이 된 걸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이들의 분노로 뒤집힌 눈은 원래의 규정과 자신들의 정체성마저 잊게 했다. 유대 민족주의자들인 이들은 안식일 규정을 자신들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정체성의 표지로 생명처럼 여겼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안식일의 의미를 복원하고 완성하자, 그들은 대답 대신 배척해오던 헤롯당원들에게로 달려간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에 세금 납부를 반대하며 식민지 상황에서 유대 전통을 지켜 민족 정체성을 살려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헤롯당원들은 로마의 하수 정권인 헤롯 왕가에 부역하여 현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헤롯당원들은 로마에 납세했다. 즉 서로 섞일 수 없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같은 적대 세력끼리 예수를 죽이기 위한 공통 목표에 야합한 것이다. 얼마 뒤에도 헤롯 왕과 빌라도 총독이 서로 원수였으나 예수를 죽일 때 친구가 된다.
이들의 모습으로 오늘을 보자. 규정을 생명같이 여기나 규정으로 생명을 죽이는 일들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예는 여호와의증인이다. 이들은 헌혈과 수혈을 거부하는데, 이 때문에 여호와의증인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아이가 부모의 수혈 거부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사망했다. 여호와의증인 의사 인턴은 집도의의 수혈 지시를 거부하고 식염수만 주입하다 환자를 죽일 뻔했다. 다행히 집도의인 박경철 의사가 직접 수혈하여 환자를 살렸다. 다음엔 여호와의증인 가정의 아이가 입원했는데, 부모가 수혈을 극구 거부했으나 수술받을 아이에겐 피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비밀스럽게 혈액을 투입하여 아이를 살렸으나, 앞의 여호와의증인 인턴이 아이의 부모에게 귀띔했고, 그 부모는 아이를 살린 의사에게 따졌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한편으론 어떤 이유와 기준으로 시작했든, 한번 미워한 뒤에는 명분이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본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대상을 끝까지 반대하고, 장점이 보여도 외면할 뿐 아니라, 관련된 모든 것을 싫어하기까지 한다.
서로 적대적인 세력끼리 한 목표를 위해 야합하는 모습도 종종 나타난다. 대립하던 거대 양당 출신인 이낙연과 이준석이 손을 잡고 곧 있을 총선을 대비한 신당을 창당했다. 이러한 야합이나 공동의 적이 생겨 연대할 때 서로의 과거를 묻어두고 서로를 귀순 용사처럼 환영하기도 한다. 윤석열 정권에 반대하며 한 무대에 선 김용민과 변희재는 원래 서로를 비판하던 사이였다. 그러나 최근 민주 진영 내에서 윤석열 정권과 여당을 비판하는 변희재를 영웅시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보수를 표방하는 그였기에 보수 표방 정권의 민낯을 호쾌하게 지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노무현 전 대통령, 세월호 유가족 등을 모욕했던 과거를 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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