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1.29.-30.(월-화)
정리: 2024.01.29.-30.(월-화)
합신 청년 연합 수련회 첫째날 후기
대학 때와 선교연합기관에서 간사로 사역할 때는 예수 피를 나눈 동역자들과 함께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몸 된 교회 의식으로 만난 적 없거나 적대적인 사람들마저 사랑했었습니다. 하지만 사임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 점점 새로운 청년 세대들과는 알게 모르게 심리적 장벽이 생겨나더군요. 누구에게나 다가가 환대하고, 시장이나 거리에서 우연처럼 알게 된 사람과 대화하며 전도하던 저는, 점차 아무에게도 먼저 인사하기 어려워질 정도로 위축되기까지 했습니다.
수련회에 가려고 예배당에 모였을 때, 문득 참가하는 청년들과의 나이 차를 실감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청년이라는 오랜 착각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죠. 이미 뒷자리로 빠진 30대 후배들처럼, 진작에 물러났어야 했는데 이제야 깨달은 거라고 느꼈습니다. 청년부에서 쓰임 받을 기회도 없는데 여전히 무언가 해보겠다고 삐거덕거리고 있던 자신이 주책 같았습니다.
그래서 수련회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 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개회 예배에서부터 제 마음을 혁신하셨습니다. 다윗과 성경의 여러 예를 통해 살핀 공동주의 정신은 혼자 기도하고 혼자 성경 파고 혼자 예배하며 좁아진 제 시야를 다시 넓혀주었습니다. 옆 사람이 울고 있는데도 함께 울지 않고 탁월한 개인이 우뚝 서는 게 성공의 기준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뒤처지고 짐이 되더라도 ‘누구도 제외되지 않았다’는 게 성공의 기준이라는 설교는 회개와 소망을 동시에 일으켰습니다.
돌아보니 올해만 해도 운영하는 QT 블로그 링크를 나눌 때 적어도 한 명의 청년이 반응하고 있고, 합신이단상담소 간사로서 이단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을 얇게나마 도와줄 수 있었고, 두세 사람이서 독서 모임을 하는 등 제가 원하는 사역을 하지 못했을 뿐,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 섬김의 자리에는 계속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인생에서 제 뜻과 계획대로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내가 있다는 걸 인정하길 거부하고 불만족하고 있었을 뿐이었죠.
첫 날 예배를 마치고 이메일이 와서 확인해보니, 여전히 저를 좌절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낙담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낙담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계획을 알 수는 없어도, 선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니 내 영혼과 인생은 안전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피었다 지는 들꽃과 같고, 파도를 스치는 바람에 흩날리는 포말과도 같은 저를 귀하게 여기셔서 아들을 희생시키신 분입니다. 세상이 나를, 우리를 모른다 하여도 주님은 그 이름 마음에 새기고, 나와 우리는 주 이름을 열방에 새길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조조는 “내가 천하를 버릴지언정 버림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2015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버림받을지언정 사람을 버리지 않겠다.” 심지어 교회가 나를 버려도 저는 그리스도의 몸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는 주의 것임을, 그래서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시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백성이고, 주는 우리 하나님이심을 다시 고백합니다. ‘우리’가 모든 족속이 되기까지 다시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내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
'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3:20-30 | 억울하고 외로워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며 (0) | 2024.02.09 |
---|---|
마가복음 3:13-19 | 안식, 부르심의 목적 (0) | 2024.02.08 |
마가복음 3:7-12 | 강물의 비전을 따라 (0) | 2024.01.29 |
마가복음 3:1-6 | 증오의 연쇄 (0) | 2024.01.27 |
시편 60:1-12 | 진정한 성공 (0) | 2024.01.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