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1.27.(토)
정리: 2024.01.28.(일)
마가복음 3:7-12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강물의 비전을 따라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 사도행전에 이르러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할 터였다(행 1:8). 본문의 상황에서는 앞으로 제자들이 찾아갈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려 몰려오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물러가시고 피하신다. 왜 그랬을까?
유진 피터슨이 편찬한 <메시지 성경> 한역본에 보면 “무리에게 밟히지 않도록”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사람들은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이상 막 3:7-10, 메시지).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예수께 나아오는 무리의 모습에서 베데스다 주변의 환자들을 연상해볼 수 있다. 베데스다 못에서 물이 요동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고 하는데, 그래서 덜 아프거나 덜 다친 사람, 힘이 있는 사람 등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보다 베데스다 가까이 자리를 차지하고, 물이 요동칠 때 빨리 이동할 수 있었다. 선점해야 하고 공유할 수 없는 한 가지 공동 목표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체계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아무리 칭송하고 원해도, 그 환호와 칭찬 속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을 바라보셨다.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서로를 밀치고 밀어내는 모습을, 그러다 누군가 죽거나 다치는 모습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베데스다가 되기보다 그리스도의 몸인 제자들, 즉 교회가 온 세계 움직일 수도 드러나지도 않은 구석구석으로 퍼져가기를 원하셨다. 그분이 베데스다 외곽에서 그림의 떡처럼 못만 바라보던 38년 된 병자를 직접 찾아가셨듯이.
이것이 고인 물이 아닌 흐르는 강물의 비전이다. 창세기 초반 태초의 동산에서 강이 여러 줄기로 흘러나오듯이.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 성전에서 흘러나온 강물이 점점 커지며 온 열방으로 흘러가듯이. 요한계시록의 생명수가 온 세계를 휘돌 듯이.
그리고 강물은 점점 아래로 흐른다. 인생의 패배자들, 사회적 약자들, 일어날 기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서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깃발 꽂고 건물 짓고 오라고만 하지 않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직접 간다. 갈 수 있는 힘도 없고, 예수가 누군지 들어본 적도 없거나 오해와 불신으로 적대적이어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나온 요단 강 건너편과 두로와 시돈 등지로도 예수께서는 직접 가셨다.
한편 예수께서는 더러운 귀신들의 인정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명백한 악에 대한 거부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나 가난의 탈출을 위해 악한 집단에서 주는 상이나 지원금을 받아야 할 때가 온다면 단호히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인간의 갈등을 심도 있게 다룬 한 미국 소설에서는, 유능한 변호사에게 범죄 사실이 명백한 마피아 두목을 변호해달라고 조직원이 찾아온다. 수임하기도 전에 마피아는 변호사에게 맛보기라며 벤츠를 선물한다. 재물의 유혹에 넘어지는 가시떨기가 아니라 좋은 밭이 되려면(마 13장), 인내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우리는 교회인가? 그렇다면 모이기에 힘쓰는 것(히 10:25)에 더하여, 흩어져서 척박한 땅을 촉촉이 하는 데에 우리의 눈물과 피를 뿌리기에도 힘쓰자. 그럴 의지나 용기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구하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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