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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마태복음 4:1-11 | 금식의 목적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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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11.25.(월)
정리: 2024.11.26.(화)


마태복음 4:1-1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금식의 목적

오늘로 금식 42일차다. 중간에 한 번 끊긴 걸 제외하면 36일차. 그러네 기간 내내 제대로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광야에 홀로 있지도 않고, 온갖 시험에 숱하게 넘어져 왔다. 그리고 오늘 예수께서 광야로 들어가 40일을 금식하시고 시험을 받는 본문을 만났다.

얼마 전에 미국 목회자들이 한다는 이상한 금식이 떠올라 속으로 비웃었다. 식사를 아예 거르는 게 아니라 ‘고기 금식’, ‘커피 금식’ 같은 금식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당분간 끊어낸다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금식이란 곡기를 끊고 목숨을 걸면서 하는 거라고, 성경의 인물들도 그랬다고 생각해서 미국인들의 금식을 웃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내 금식도 웃기는 금식이다.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할 영양을 공급하지 않은 채로 온전히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는데, 나는 식사만 안 했지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할 건 다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식욕을 제어하는 금식만이 아니라 그릇된 욕망도 끊어내는 금욕까지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하나님께 몰입하며 기도해야 했다.

예수님의 금식은 여러모로 특이했다. 그분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 같은 장면을 다루는 마가복음은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고 표현한다. 영어 성경인 KJV에서는 “driveth Him into”, 즉 광야로 몰아넣었다고 번역했고, NASB는 “impelled Him to go out”, 즉 광야로 가도록 강요‧재촉했다고 번역했다. 원어 성경이라 볼 수 있는 헬라어 성경에서는 “ἐκβάλλει”라는 단어를 썼는데, 쫓아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 쓰인 단어이기도 하다(마 9:34, 12:24, 12:26, 막 3:22, 눅 11:15), 성령이 강제력으로 광야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예수께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to be tempted by the devil” - NASB, NIV / “to be tempted of the devil” - KJV)”라는 특이한 목적을 가지고 내쫓기듯 광야로 들어가셨다.

우리는 보통 금식하면 하나님께 더 깊이 나아가고,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을 누리며 기쁨이 넘치고 능력이 나타날 줄로 기대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에 광야로 내몰렸고, 금식하고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내가 금식하며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고난을 자처하면서까지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기도의 응답? 그건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이다. 시험을 이기는 믿음을 위해? 앞서도 적었지만 나는 시험에 무너지는 인생을 금식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살고 있다. 금식의 결과가 내 기대와 다르게, 심지어 정반대로 되어도 좋은가? 그냥 몸만 상하고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중요한 것은 금식을 하냐 안 하냐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예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은 마음을 지켜(잠 4:23) 하나님의 말씀을 검으로 삼아 휘둘렀기 때문이다(엡 6:17).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믿음의 방패는 사탄의 모든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엡 6:16). 하와는 사탄과 말을 섞다가 설득당했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미끼를 가차 없이 끊어냈다. 사탄은 예수님과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어서 화제를 계속 돌려야 했다. 그러나 이 시도 저 시도 모두 단호한 방화벽에 차단됐다. 유혹에는 호기심을 가지거나 말을 섞을 여지를 아예 주지 않는게 상책임을 예수께서 보이신 것이다.

최근 내가 받는 시험은 무엇이 있을까. 나를 일생 동안 괴롭힌 유혹에는,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요즘 듣는 자존심을 깎는 말들엔 다시 한 번 상처받지 않기로 한다. 물과 바람 같은 성령을 닮아가며, 물과 바람이 타격을 받지 않는다는 걸 어제 교회에서의 나눔에 이어 오늘도 되새긴다. 원래는 최근까지 타격이 없었는데, 요며칠 조금씩 기분이 상해왔었다. 상대방의 흠을 발견하면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둘 모두를 포기한다. 나에게서 나를 비워내고 십자가에 못 박는다. 상처받는 나를, 남을 원망하는 나를 죽인다.

금식은 결국 나를 죽이고 비워내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살아가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 말씀 앞에서 다시 이를 알게 되니, 다시 평강이 내게 찾아와 스며온다. 감사할 따름이다. 이를 알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성령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다 괜찮다.

더하여, 금식의 목적을 생각할 때 유명한 구절이 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내 금식으로 누군가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내 굶주림으로 내가 생각하는 분이 인생의 영원한 난제에서 자유케 하는 진리(요 8:32)를 얻기를 소망한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흑암의 권세에서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가길 갈망한다(골 1:13).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사역 후원 및 자율 헌금: 하나은행 748-910034-87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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