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7.22.(월)
정리: 2024.07.24.(수)
사도행전 11:19-30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환난으로 흩어져 확장된 우리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졌다. 그곳에서 유대인과 헬라계 유대인에게 구약 성경으로 예수를 전하다가, 몇 사람이 헬라인, 즉 그리스인에게도 예수를 전했다. 그랬는데 이게 웬걸, 유대인도 아니고 성경으로 잘 증거하지도 못했는데, 수많은 헬라인들이 예수를 믿었다. 어떻게 구약 성경 지식이 없던 헬라인들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믿는 게 가능했을까? 사도행전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힌다.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통해 일하신 것이다(고전 1:21).
사도행전은 이어 헬라인들에 대하여 “주께 돌아오더라”고 적는다. 영어 TNIV에선 주께 돌이켰다(turned to the Lord)고 적는다. ‘turned’ 뒤에 ‘back’을 넣어야 한글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처럼 돌아온다는 의미가 강조되지만, TNIV의 번역도 가던 길을 틀어서 주께로 향했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쨌거나, 헬라인 역시 하나님께서 되찾아야 할 사람들이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로마인이든 한국인이든, 인종과 집안 종교에 상관없이 창조자이자 아버지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고 돌이켜야 할 사람들이다. 강압적이고, 내 말을 들어주지 않고, 명령하고, 고집 센 아버지가 아니라, 내게 몸을 숙이고, 귀를 기울이고, 사랑의 눈을 맞추고, 포용하고, 달려와 안아주는 진정한 아버지와의 만남과 관계 회복을 이루어야 한다. 내 마음에 항상 생각하는 분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예루살렘 교회는 빌립이 에티오피아인에게 세례를 준 사건, 베드로가 로마인들에게 세례를 준 사건을 겪으며 비유대인에게도 성경과 성령이 적용된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헬라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놀라운 소식을 확인하고자 바나바를 보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자 사도들과 집사들을 세운 기준처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를 믿은 헬라인들이 기뻐할 형제라는 걸 알았고, 다소에서 데려온 사울과 함께 안디옥에서 형성된 ‘교회’에 머물며 주께서 분부하신 바를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기에 힘썼다(마 28:20).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졌다.
유대인만도 아니고, 헬라계 유대인만도 아니고, 헬라인만도 아닌, 각종 인종이 한 믿음으로 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성령을 받고 한 성경을 배웠다. 이들을, 우리를 유대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헬라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들을 지칭할 말로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새로 생겼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기 때문이며, 이들이 대표적으로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이었다. 이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지도하던 재정적으로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지원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인이란 용어는 당시에는 비아냥과 조롱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오늘날로 치면 예수쟁이 같은 말이었다고. 훗날 경건한 삶을 추구한 감리회 사람들도 형식주의자(methodist)란 말로 조롱당했는데, 감리교인들은 이 용어의 좋은 면을 살려 스스로를 Methodist라 부르고 있다.
환난으로 흩어졌으나 덕분에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고, 요셉은 억울한 종살이와 무고한 옥살이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지난한 소송이라는 자초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늘은 아침부터 사장님께 긴 잔소리를 듣고, 원고 변호사는 원고와 이야기가 덜 되었다며 즉답을 피하고 내 추가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모 회장님이 생신이라 전화했지만 두어 번 받지 않고 끊었다. 메시지를 보냈는데 읽고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도 자신이 저지른 살인 때문에 도망간 광야에서 이집트인도 히브리인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비워져 갔다. 나도 이 기간 동안 나를 내려놓고 비워가기를. 조롱과 경멸의 멸칭이 내게 덧씌워질지도 모르나,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도 부끄러우나, 남은 내 생애에선 내게 내가 아닌 하나님만으로 채워지고 하나님만 남기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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