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사도행전 17:22-34 | 진리를 나누는 기쁨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8. 16.
반응형

작성: 2024.08.14.(수)
정리: 2024.08.16.(금)


사도행전 17:22-34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진리를 나누는 기쁨

어제는 고무적인 날이었다. 독서 모임에서 책 한 권을 마무리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기 전에 식사 교제를 하기로 했는데, 저녁 8시 반에 모여 식사를 마치고도 24시간 무인 카페에서 새벽 3시 가까이까지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남자 셋이서 유익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중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한 형제가 인생의 고난을 이야기할 때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이유를 말하려고 했다. 나는 얼마 전 읽은 고(故) 유석경 전도사님의 『당신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규장)의 내용을 이야기해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주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고. 고난이 있는 건 세상이 죄로 타락했기 때문이라고(나의 경우는 대개 내 욕심에 이끌려 넘어졌기 때문).

하나님께서는 고난이 오는 걸 허용하거나 허락하시기는 해도, 직접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고난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룰 퍼즐 조각으로 쓰시지만, 자녀의 성숙을 위해 일부러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다고 여기면 그분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모욕 받고, 버림 받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고난을 아시는 분이 내 고난을 아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걸 안다면, 오히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 그 형제의 관점이 바뀌며 상당히 놀라워했다. 하나님을 말하고 진리를 나누며 사람이 변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건 가슴 벅찬 일이다.

본문의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계 유대인이 아니라 아테네의 ‘찐’ 헬라인(그리스인)들에게 하나님을 전한다. 구약 성경을 아예 모르는 그리스 사람들이다 보니, 바울은 성경을 이야기하기보다 그리스인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노력의 일환으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세운 제단을 소재로 설교를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 시인(철학자)의 말도 인용한다. 바울은 그리스인들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식하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은 유대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며 우주 만물을 지으신 천지의 주재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독교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께서 한 혈통으로 만드신 인류 모든 민족이 공의의 심판에서 구원 얻기를 열망하시기 때문이다. 사랑하니까.

바울이 구원의 길을 이야기하자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와 같은 갖가지 반응이 나온다. 먼저 조롱이다. 성경을 두루 알고 그리스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로마 시민권자 바울은, 조롱과 핍박에도 믿기지 않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1-24)

그리고 바울은 호기심이란 반응도 접한다. 간접적으로 예수나 기독교에 대해 매스컴 등으로 접한 것과 직접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걸 듣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것은 다르다. 수련회에서 만난, 교회에 아예 처음 온 청년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처음 듣는 말에 잔잔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리워하는 분은 약속한 것처럼 내가 아니더라도 계속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을까. 그분이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보다 더 그분을 그리워하는 하나님을 그분이 만나기를 소망한다.

참, 원고 변호사 사무실 방문 일자가 27일 화요일로 미뤄졌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사역 후원 및 자율 헌금: 하나은행 748-910034-87207

↓ ♡와 [구독하기]를 눌러주세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