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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44-60 | 성령 충만해도 고난은 있다. 하지만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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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에게 돌을 날리는 사람들과 지켜보는 사울

작성: 2024.07.10.(수)
정리: 2024.07.10.(수)


사도행전 7:44-60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성령 충만해도 고난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예수께로 끌고 온 적이 있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예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하려는 의도였다. 율법을 따라 돌로 치라고 하면 살인을 옹호했다고 로마 법정에 고발할 할 테고, 용서하라고 하면 죄를 간과하고 율법을 어긴다고 몰아붙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특이한 행동을 한다.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쓰신 것이다. 어떤 글이었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지만, 땅에 글씨를 쓰신 예수께서는 모인 사람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껴”(요 8:9) 하나씩 하나씩 모두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둘만 남은 성전에서 예수는 여인에게 묻는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주여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비난과 공개 처형의 현장에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상을 직면시키고 은혜를 베푸신다(이상 요 8:1-11).

내가 이집트를 떠날 때의 모세나 유대인들이 예수께 끌고 나온 여인처럼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되려나. 그러할지라도 십자가에서 죄와 수치를 당하신 주께선 나를 버리지 않으실 것을 안다. 그리고 나도 다시 같은 죄를 범치 않아야 하리라. 그렇지만, 그러할지라도 주께서 내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어주시기를 간구한다.

예수님의 이 사건은 바울, 즉 본문 당시 이름인 사울이 훗날 써서 교회에 읽힌 편지 내용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였는데 한 사람도 그리하지 않고 오히려 자리를 피했다. 바울은 로마서 등에서 구약을 인용하여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며,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밝힌다.

모두가 죄인이자 멸망에 처해 있기에, 은혜받은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용서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한 길을 구원과 용서의 길로 열어놓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런데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이 찔”린 사람들은 예수님 때와는 달리 돌을 들고 스데반을 살해했다. 자신의 죄된 실상이 드러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부끄러워 숨거나, 회개하거나, 적반하장으로 분노를 드러내는 등 다양한데, 이때의 사람들은 최악의 반응을 택했다.

본문 당시의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 그도 이를 간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의 분노가 어찌나 컸던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대제사장에게 ‘예수쟁이’들을 체포할 권리는 받아서 외국을 다니기까지 했다(행 26:9-12).

한편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주의 영광을 보는데, 자신이 본 것을 달했기 때문에 이미 분노한 사람들에게 성 밖으로 쫓겨나 투석형을 당했다. 로마 재판장도 아닌 피지배 민족 군중에게 사형을 결정하거나 집행할 권리가 없었음에도(요 18:31), 이들은 로마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스데반을 죽도로 미워했다. 이들의 증인들은 옷을 벗어 사울 앞에 두는데, 로마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조사할 때 자신들이 죽였다고, 또는 사울에게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스데반을 죽이는 걸 마땅히 여겼는데, 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는 군중이 빌라도 총독에게 그 피의 대가를 자신과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한 광기에 비견될 만하다(마 27:22-25).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아버지께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는데(눅 23:46), 스데반은 주 예수께 자신의 영혼을 받아달라고 기도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는데(눅 23:34), 스데반도 돌을 던지는 이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한다. 성령 충만한 그는 예수님의 길을 충실히 따라갔다.

성령 충만하다고 인생이 잘 되고 형통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와 핍박과 불명예가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그 깊이를 더 누릴 수 있다. 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이요 가치다. 내 안락과 명예와 미래와 목숨마저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창조자요 구원자께서 바라보시는 참 자신을 발견하라. 바울은 이렇게 적는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성령 충만을 구하라. 그러면 그리스도를 알고 내가 몰랐던 자신을 볼 것이며, 내가 억지로 기존의 가치를 내려놓지 않아도 가장 고상한 그리스도를 추구하며 서서히 가벼워질 것이다. 그 과정에 따르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길이며, 그리스도를 더 아는 복되고 즐거운 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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