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1.21.(일)
정리: 2024.01.21.(일)
사무엘상 2:12-17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진정한 예배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이면서도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자신들이 취했습니다. 갈고리로 고기를 찔렀다는 것은 좋은 것을 골라 가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주께서 택한 백성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지고서도 우리는 예배를 입맛에 좋은 대로 골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는 찬양을 감격해서 드립니다. 좋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에 합당한 찬양과 경배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찬양할 때 눈을 감고 손을 들며 열정적으로 찬양하던 그는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와 우리 중 한 사람이 대표로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 다친 지체를 위해 함께 입을 모아 기도할 때 휴대전화로 메신저를 하거나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또 누군가는 찬양과 아울러 기도를 열정적으로 합니다. 좋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나 새벽 기도회와 심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출석하며 가장 마지막까지 기도하던 그 사람은, 성경과 설교의 가르침에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집중적으로 하나 됨과 화해, 지체 사랑, 교회 됨을 설교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치유 받지 않은 채,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고 무시하는 식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문제가 생긴 상대방이 자신을 시기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점차 공동체와 관계하지 않고 교제에 전혀 참석하지 않게 되었고, 나중에는 예배조차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설교를 우선합니다.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한 바를 귀 기울여 듣고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설교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며 찬양을 ‘준비 찬양’으로 여기고, 설교 전에 드리는 찬양을 소홀히 여겨 지각을 하고도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찬양을 열정적으로 드리고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들을 속으로 비판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교제만을 즐거워합니다. 바쁘고 파편화된 현대 사회의 영향 아래, 현대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가 과거 교회보다 약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데에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대화와 상담, 놀이와 공동 활동에만 주력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하는 설교에는 관심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예배하는지, 무엇을 예배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찬양하던 겁니까, 아니면 찬양할 때 고조되는 감정을 예배하던 겁니까?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자신을 겸손히 낮추고 있던 겁니까, 아니면 자신의 소원과 정당성만을 하나님께 들이밀고 있던 겁니까? 우리는 어쩌면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우리 입맛에 맞는 예배의 양식만 골라서,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내가 먹은 건 아닙니까? 우리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만족을 예배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까?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상징화한 금송아지를 예배한 출애굽 공동체나 분열 왕국 시기 여로보암 왕의 죄와 같지 않습니까? 꼭 돈과 성공을 하나님으로 포장한 것만이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감정과 지혜라 하더라도 감정의 고조와 우월감 등 자기 만족을 본위에 두는 모든 예배가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우상 숭배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중심을 살피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찬양과 기도, 설교와 교제, 헌금까지 교회에 머무르는 모든 시간을 충실히 보낸다 하더라도,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간다면 이 또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적 예배(롬 12:1)라 보기 어렵습니다. 예배는 좋아하고 찬양도 찾아 듣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1500년 동안 쓰신 사랑의 편지인 성경은 꺼린다면, 그나마 유명하거나 마음에 드는 몇 구절만을 골라서 좋아한다면, 이 또한 홉니와 비느하스 같은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찰스 스펄전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은 성경책을 먼지가 쌓인 채로 두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배당에서는 존경 받는 직분자지만, 가정과 일터에서는 움츠러들어 있거나 반대로 너무 거침이 없다면, 내외적으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예배자가 맞을까요?
우리가 길가에 버려져 밟히는 소금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여러분께 부탁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기를. 함께 살아갑시다.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또한 우리가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취향대로 골라서 예배하지 않고, 오히려 바울처럼 자신의 남은 삶을 전제처럼 남김없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쏟아붓기를 소망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인생처럼 “최상의 하나님께 나의 최선을 드리”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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