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5.14.(화)
정리: 2024.05.14.(화)
사무엘하 10:9-19
요압이 자기와 맞서 앞뒤에 친 적진을 보고 이스라엘의 선발한 자 중에서 또 엄선하여 아람 사람과 싸우려고 진 치고 그 백성의 남은 자를 그 아우 아비새의 수하에 맡겨 암몬 자손과 싸우려고 진 치게 하고 이르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요압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아람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나아가니 그들이 그 앞에서 도망하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함을 보고 그들도 아비새 앞에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간지라 요압이 암몬 자손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아람 사람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음을 보고 다 모이매 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 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하닷에셀에게 속한 왕들이 자기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함을 보고 이스라엘과 화친하고 섬기니 그러므로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아니하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진짜 성공
암몬과 아람의 연합군과 이스라엘 군영이 맞섰다. 이 자리에 다윗은 없었다. 총사령관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는 각 군을 나눠 하나씩 아람과 암몬을 맡았다. 전장에서의 요압은 목숨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싸움에서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지도자로서 아비새와 군사들을 독려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12절)
요압의 말에서 신앙인의 덕목을 우물에서 물을 긷듯 건져낸다. 담대할 것, 하나님의 최선을 믿고 그분의 인도와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될 것, 남을 돕고 일으킬 것 등. 그런데 이런 요압이 남의 아래에 있을 때는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단점이 있었으며, 나이가 들어 정계에 진출한 뒤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꾀를 따르는 태도를 보이니, 이런 요압의 모습에서 마땅히 교훈을 취하여 자신을 경계할 바다.
요압과 아비새의 목숨을 건 돌격에 돈 벌려고 암몬을 도우러 온 아람 용병군은 패퇴하여 달아났다. 돈보다 목숨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아람이 퇴각하는 걸 본 고용주 암몬도 중과부적을 느꼈는지 싸움이 글렀다고 판단했는지 후퇴했다.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개선했다.
돈 받고 고용되어 이스라엘을 정벌하려던, 그래서 추가 이득까지 취하려던 아람은 이제 돈 문제를 넘어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었다. 그들이 먼저 싸우러 온 것이었지만, 전사자와 그 가족들을 생각해서인지 적반하장으로 움직였다. 지난 번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의 전력을 가늠한 아람은, 암몬이 자신들을 끌어들인 것처럼 다른 아람 지파를 끌어들인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이번에 친정(親征)을 나선다. 보병 위주에 나귀를 탄 병사들로 구성된 이스라엘군이, 병거와 기마병들로 구성된 아람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군사령관 소박까지 전사시킨다. 처음 가나안에 진입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의 철 병거를 두려워하고, 사사 시대에도 하솔 가나안의 철 병거 부대에 눌려 있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다윗의 승리는 철기 문명의 외적을 두려워해온 조상들보다 우월한 전공을 세운 것이었다. 게다가 이로써 아람은 암몬과의 관계를 끊고 이스라엘에 충성을 맹세한다.
분명 큰 승리의 기록인데, 본문이 수록된 <시냇가에 심은 나무>(IVP) 2013년 10월호는 예리한 지적을 한다. “다윗은 이방 나라와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에게 묻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삼하 5:19-24 참조).” 이전과 다른 다윗의 모습. 다윗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자신감을 가진 듯하다. 현재의 강성함, 전투 경험과 전략 등등으로.
이는 훗날 요압이 보여줄 모습이기도 하다. 목숨을 건 전장에서는, 가진 게 적을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지만, 어느 정도 자신의 기반이 탄탄해진 뒤에는 하나님 대신 그 기반을 의지하는 모습이다. 바로 다음 장인 사무엘하 11장에서 이 다윗은 전쟁에 군사들을 보내 놓고 자신은 왕궁에 머물 때, 다른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아름다움 대신 사람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법도 대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을 따른다.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받아온 십계명에는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했다(출 20:17).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충성하여 귀화까지 한 휘하 장수 우리아의 아내를 보고, 그동안 걸어온 길에서 치우쳐 이탈한다. 이제껏 믿음의 사람이자 정의와 공의의 집행자로 자자했던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나아가 그는 우리아를 교살(狡殺)하기까지 한다.
요즘의 내가 이런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했다(마 7:1-5, 눅 6:41-42). 최근 교회의 한 청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람을 외면하는 모습을 비판했는데, 나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는 구절을 근거로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나 진짜 거짓말쟁이는 나였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실은 사람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의 십계명을 알면서도 어겨왔다. 나는 위선자요 죄인 중 괴수다.
그렇다면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려고 항상 목숨 건 긴장 속에서 예민하게 살아야 할까. 바울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고 말한다. 어떻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빌 4:13)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자족(빌 4:11)하는 것이다. 핵심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 거하는 것.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셨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고 하셨다. 날마다 내가 죽고 예수 사는 것. 내 주권이 죽고 하나님의 주권이 내 마음의 생각과 인생을 다스리는 것.
요즘 내 탈선을 멈추는 큰일을 겪으며 다시 마음이 가난해져 하나님께 나를 내려놓고 있다. 하나님을 늘 의지하여, 혹 내가 부유하고 평안할 때라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 박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대로 살기를. 그렇게 살고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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