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4.23.(화)
정리: 2024.04.23.(화)
사무엘하 3:22-30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암살
명목상 왕인 이스보셋을 제치고 이스보셋에 대한 분노로 국가 권력을 다윗에게 이양하는 아브넬. 그리고 왕인 다윗을 제치고 아브넬에 대한 분노로 그를 제거한 요압. 요압의 동생 아사헬의 배를 창으로 꿰뚫어 죽인 아브넬. 그리고 아브넬의 배를 찔러 죽인 요압. 아브넬은 자기가 한 대로 되갚음을 당한 거겠지만, 요압의 행각 역시 아브넬과 다를 바 없었다.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요압은 아브넬이 헤브론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 왕에게 따진다. 그는 아브넬이 정탐을 목적으로 헤브론에 온 거라고 다윗을 설득한다. 설마 다윗이 그걸 분별하지 못했을까. 다윗은 사울의 딸이자 이스보셋의 누이인 미갈을 데리고 오라고 했었고, 아브넬은 그대로 따랐다. 볼모가 될 수 있는 왕족을 데려온 것으로 다윗은 아브넬의 사울 잔당 내에서의 위치와 항복 의사를 확인한 터였다. 그런데 요압이 왕이 속고 있다고 한 것은 다윗을 무시한 발언이었다.
좋게 봐서 신하의 충언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렇다고 왕의 재가는커녕 왕에게 보고도 없이 임의로 상대국의 사신이자 최고 실권자인 국빈을 속여 살해한 것은 앞날을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애초에 그가 다윗에게 따진 말도 나라나 왕을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닌, 아브넬을 싫어하기 때문에 왜곡된 관점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나라나 왕을 생각한다면 아브넬을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요압의 일로 사울도 자기 손으로 건드리지 않아 백성들에게 신망과 인지도를 쌓아온 다윗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게 되고, 순조롭고 평화롭게 진행되던 흡수 통일에도 큰 장애물이 생겼다. 다윗은 서둘러 아브넬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며 애곡하고, 요압과 선을 그으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저주마저 한다. 유다에 정상 회담을 하러 왔다가 암살당해서, 당황하고 복수하자고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사울 잔당의 민심을 달래고, 요압 일가를 견제해야 했을 것이다. 후문맥에서 다윗은 자신이 왕인데도 왕권이 약해 요압 일가를 제어하기가 어렵다고 하나님께 처분을 맡긴다(삼하 3:39). 요압을 그대로 두면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휘두르듯 다윗을 휘두르려고 할 것이다. 이미 왕을 속이고 아브넬을 죽인 요압이었다.
요압은 아사헬이 왜 죽었는가를 큰 틀에서 보아야 했다. 아사헬은 남북 통일을 위해 헌신하다가 순국한 영웅이 되었다. 이제 아브넬이 항복해서 통일의 때가 왔는데, 요압은 나라의 운명보다 자신의 복수가 중요해서 영웅의 뜻(당사자가 원했는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는 상관없이)을 저버렸다. 요압이 분노를 미루었다면 다윗에게 통일 이후 아브넬의 처분을 물어보거나 논의했을 텐데, 그는 그보다 직접 아브넬이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절호의 기회에 사울을 죽이지 않은 다윗과 달리, 아비가일의 만류에 나발을 죽이지 않은 다윗과 달리, 요압은 엘리사 선지자를 떠나 아람으로 귀국하는 나아만의 뒤를 선지자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쫓아간 게하시처럼 아브넬을 찾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장을 살려주고 예우하는 건 관례요 전통이었다. 그래야 서로의 표출된 적개심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병사들과 그 가족들에게 전쟁이 끝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며, 적군에 항복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소망을 주고, 적국 본토의 민심을 누그러트리고 추가 반군이 일어날 것을 방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적을 이기고 힘으로 눌러놔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전론자 요압은 적장 아브넬을 죽여 집안 원수를 갚고 사울 잔당의 기를 꺾어놓아야 통일에 도움이 된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요압의 충성(?)은 왕이든 누구든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이며, 기드온이나 사울처럼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자기 소견에 옳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모순이다.
지난번에 적은 대로, 북한에서 김씨 왕조를 누르고 실권을 잡은 누군가가 있다고 하자. 그는 6.25 전쟁 당시 북한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이제는 대한민국에 항복하겠다며 통일 관련하여 정상 회담을 하러 서울에 방문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6.25 참전 용사 중 한 사람이 전쟁에서 형제를 잃은 복수심으로 북한 정상을 테러한다면?
충분히 심정적으로는 참작 가능하나, 그렇게 한다면 자신이 전쟁을 치르고 형제가 희생한 의미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고 부강한 한반도의 한 국가를 세우려고 참전한 게 아니었나. 해당 테러는 한반도 북쪽에서 ‘역시 남조선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등의 동요를 일으킬 것이고, 심지어 김씨 왕조가 재집권해 통일이 멀어지거나 심하게는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요압의 아브넬 암살이 이런 것이었다. 아브넬이 사라진 자리에 이스보셋이 정권을 탈환한다면?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죽음을 이용해 사울 잔당의 분노에 불을 지핀다면?
또한 요압이 개인적 감정을 넘은 주전론자가 맞다면, 다윗이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의 마음을 얻으려던 것과는 달리,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분열론자일 가능성까지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찬동하는 쪽은 국민이고, 반대하면 비국민으로 몰아 탄압하는 독재자를 우리 시대에도 보고 겪고 있다. 지역을 나누고, 세대를 나누고, 성별을 나누고, 소득 분위를 나누어 특정 편을 들고 상대편을 적대시하는 사람이 요압이라면, 온 이스라엘을 위해서도 다윗의 위를 위협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됐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 나발, 요압 등 원수들의 처분을 하나님께 맡겨왔다. 반면 요압은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을 무시하고 자신의 군권을 활용한다. 나 역시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당장의 행복을 위해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법도를 어겨왔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상의 없이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려 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엇나감을 막으시고 나를 돌이키고 계신다. 또한 내가 해온 모든 것들에 열매가 극빈하게 하셨다.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다윗처럼 원수 갚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도. 내가 내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없다. 내 손에서 힘을 빼고 하나님께 맡겨야 성령께서 일하셔서 사람에게 감동을 주시고 감화하실 것이다. 그리고 내 미래도, 재정도, 건강도, 생명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
또한 구하는 것은, 왕을 넘보기보다 우리아처럼 왕께 충절을 지키는 것, 내게 명하시고 보이시는 비전, 그리고 이 비전에의 안착과 순종이다. 하나님, 이제 일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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