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4.25.(목)
정리: 2024.04.25.(목)
시편 77:1-20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개역개정)
나의 묵상: 현재가 괴롭고 미래가 절망적일 때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기도가 허망히 느껴지고, 하나님께서 귀를 막으신 것 같은 때가. 본문의 시인이 이를 표현한다.
하지만 시인은 절망의 끝에서 다른 시도를 한다. ‘(셀라)’라고 적힌 부분은 ‘멈춰서 들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어인데, 시가 노래라는 걸 생각하면 간주나 절 바꿈 구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두 번째 셀라를 지나며 현재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서 과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떠올린다.
현재의 집채만한 파도는 달을 가리고 그림자로 내 곁에 누가 있는지를 감추려 한다. 하지만 달은 어제나 오늘이나 계속 떠 있고, 내일도 떠 있을 것이다. 안 보여도 존재하는 걸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이를 기억해내야 한다. 그리고 주무실지라도 주께서 내가 탄 배에 함께하고 계신다. 그분의 침묵은 불안을 주는 게 아니라 평안을 선언하고 있었다. 풍랑에도 잠들 정도로 안전하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했으나, 번번이 잊은 적이 많았다. 그리고 예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과, 함께하는 이가 누구신지를 알아야 했고 기억해야 했다. 그러나 광풍이 이는 호수에서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주무셔서 자신들의 상황에 눈 감고 침묵하신다는 사실에 더욱 당황했고, 깨신 예수께서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자 그분이 누구냐고 서로 물었다(마 8:24-27, 막 4:35-41).
제자들은 한 끼 식사가 수많은 사람을 배 불릴 양식으로 증식한 사건들을 겪고도 남은 식량을 담은 광주리를 잊은 채 놓고 가거나, 아예 사건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많은 가르침과 사건들, 심지어 기적들마저 잊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한 말도 잊었다. 그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그가 세 번 당신을 부인하리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잡히시고 끌려가시자, 베드로는 뒤를 따르다가 추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 그때 닭이 두 번 울었고,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 통곡했다(막 14:27-31, 66-72).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그제야 전날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성경을 깨달아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은 순교 전에 예수님을 부인하라는 요구에, 구전마다 차이는 있지만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분은 86년 동안 나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그를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함께하시는 주님을 잊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오늘날, 보통 현실이 힘들 땐 미래를 꿈꾸라고 말한다. 하지만 꿈꿀 미래가 없다면? 미래를 생각할수록 더 절망적이라면? 반대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공상으로 도피하는 거라면?
시인은 되려 과거의 하나님을 기억해내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떠올려 붙잡는다. 진정한 미래는 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소망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나를 건져내시고 인도하실지는 모르지만, 최선으로 베푸실 것을 믿고, 소망한다. 주의 선한 성품과 능력대로 이루시리라.
당연한 말이지만, 이 소망은 과거로의 도피도 아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의 이름을 딴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란 말이 있는데, 한마디로 추억 보정이다. 과거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심리로, 그때가 더 좋았다는 기억 향수요 과거 미화다. 화려했던 과거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때가 정말로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든 아니든 므두셀라 증후군에 젖어있다는 건 지금이 힘겹거나 미래가 안 보이기 때문이다.
므두셀라의 시대는 대홍수와 함께 저물고, 노아 일가로 인류는 새 출발을 한다. 홍수가 있기까지 노아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붙들며 현재 속에서 미래를 준비했다. 수백 년 동안 방주를 지은 것이다. 때론 넘어져도,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께서 언젠가 주셨던 약속을 붙들고 미래를 소망하며 현재를 인내했다. 요즘 묵상하는 사무엘하의 다윗도 그렇고, 다윗을 포함한 이러한 인물들이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궁극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하나님께 미래를 묻고 현재를 토로했더니, 그분은 과거 하나님과의 추억을 상기시키시고 당신이 누구신지 기억해내라 하신다. 요즘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보이지 않고 막막한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주시지 않는 거 같은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고 버리신 것 같은가? 그렇다면 (셀라).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비전을 떠올려 보라. 그런 게 없다면 그분의 성품을 떠올려 보라. 그것도 모르겠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처음 만났을 때 경험한 그리스도 십자가의 현장성을 깊이 생각해 보라. 여기에 미래를 대비해 현재 가야 할 길이 보일 것이다.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는가? 그렇다면 만나길 구하라. 그분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며 당신을 나타내길 기뻐하시는 분이다. 여기에 소망이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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