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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사무엘하 3:6-11 | 충신의 배신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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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며 이스보셋을 떠나는 아브넬

작성: 2024.04.20.-21.(토-일)
정리: 2024.04.21.(일)


사무엘하 3:6-1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사울에게 첩이 있었으니 이름은 리스바요 아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하니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이르되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는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의 왕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하매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충신의 배신

이스보셋이 아브넬의 권력을 견제하려 한 것인지, 정말로 아브넬이 잘못을 저질러서였는지는 모르나,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추궁한다. 아브넬이 정말로 사울의 후궁과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다면, 이는 단지 부도덕을 넘어 왕위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후에 압살롬도 다윗을 축출하고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여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알렸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도가 아니었고, 당대의 통념이거나 이방 왕조 국가의 관습이었을 것이다.

어찌하였건 사울 왕가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던 이스보셋은 정치적 실권과 군권을 모두 쥔 아브넬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나 간판으로 머물고 싶진 않았던 듯하다. 그런 면에서는 동탁에게 말도 제대로 못하던 후한 황제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브넬을 꾸짖으려던 이스보셋은 도리어 아브넬의 격한 역반응을 받았다. 배은망덕한 왕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아브넬은 억울함과 한이 맺힌 듯 따졌다. 자신이 헌신해서 왕을 유지하게 해줬는데, 어찌 누명을 씌워 공로를 무시할 수가 있단 말인가? 충신을 모함하여 다윗 유다의 앞잡이로 여겨 나를 쫓아내려는 건가?

아브넬이 정말로 억울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잘못을 들키자 적반하장으로 큰소리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이 하는 것은 다 옳다고 여기는 교만하고 고집스러운,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운 성격일지도 모른다. 내심 아래로 보던 이스보셋이 자신을 지적하자 격노한 것일 수도 있다.

분을 폭발한 아브넬은 충격적인 말을 이어간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사울의 왕위를 다윗에게 옮겨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리게 하시도록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이스보셋이 자신을 배신했으니, 자신도 이스보셋을 배신하겠다는 말이었는데, 이스보셋 입장에선 사울의 후궁 사건을 넘어 대놓고 아브넬이 반역하겠다는, 사울 왕가를 없애버리겠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목숨줄이 잡힌 왕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살펴봐야 할 지점은 아브넬이 하나님의 맹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예언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사울의 후계자로 내세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다윗 유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벌어지는 국력의 차이를 실감한 걸까. 아니면 그동안 예언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다가 오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예언을 믿었던 걸까. 사울 왕가의 정통성으로 이스보셋을 간판 삼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정통성은 다윗에게 있었으니까. 이도 아니면 이스보셋의 배신에 살 길을 찾고자 예언을 빌미로 다윗에게 항복하려는 걸까. 하나님의 정통성에 훗날 여로보암 초기 북이스라엘 주민들이 남유다로 빠져나가려고 했듯이, 자신의 영지에서도 백성들이 다윗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해서 위기를 느껴서 움직였을 수도 있다. 후문맥(삼하 3:17-19)을 보면 이스라엘 장로들과 사울의 출신 지파인 베냐민 지파 등 모든 민심이 이미 다윗에게 쏠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넬이 여러 과정을 통해 정말 하나님을 믿었을까? 이스보셋에 대한 태도 등을 볼 때 그렇다기보다는 자신을 신용하지 않는 이스보셋을 버리고 다윗에게 나를 바치며 귀순하여 하나님의 예언을 따른다는 명분도 얻고 목숨과 자리를 보전하려고 한 듯하다. 자신이 이스보셋을 제거하고 왕이 되기에는 명분도 없고 민심이 따르지 않을 것이 뻔하다. 아브넬도 감히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은 하지 않은 듯하다. 그래도 아브넬에게는 왕의 재가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고, 곧 다윗에게 보낼 사신단을 꾸린다.

북한의 멸망과 남북 통일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김씨 왕조가 유력한 누군가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그 유력자가 정세를 판단해 왕조를 배신하고 남한에 항복하는 것이다. 의롭다고 할 수 없는 내부 분열로.

한편 <시냇가에 심은 나무>(IVP) 2013년 10월호는 이렇게 질문한다. “다윗은 정략결혼을 통해 세력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것은 그의 세력 강화가 아니라, 사울 집안의 분열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내 계획보다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까?(잠 16:9 참조)” 얼마 전 묵상이 다윗의 정략결혼에 대한 비판이었었다.

금요일에 『회의하는 용기』(오스 기니스 저, 복있는사람) 마지막 독서 모임을 하며, ‘비전을 품은 믿음’이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하나님께서 막연히 내게 일하시겠다고 ‘미루며’ 하루하루를 허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선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비전을 확고히 붙들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것. 미래를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게 아니라, 미래가 주의 손에 있다는 걸 믿으며 확신의 걸음을 떼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지도 않은 이것저것을 불안을 해소하려고 다윗처럼 준비해두는 게 아니라, 불타는 가슴과 총기를 되찾은 눈으로 인생의 제단에 나를 쏟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실 것이니, 주께서 내게 비전과 그 믿음을 주실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실 것이다. 전쟁의 준비와 증오를 넘어서,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과 때에.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 중 하나인 통일 문제에도 나를 필요한 데에 두셔서 쓰실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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