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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군대(2008.10.14.-2010.08.25.)

열왕기하 16:10-20 | 누구에게 경외하고 순종할 것인가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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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 왕에게 앗수르 방식의 제단을 만들어 보고하는 우리야 제사장

작성: 2009.01.15.(목)
정리: 2024.05.19.(일)


열왕기하 16:10-20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 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침 번제물과 저녁 소제물과 왕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모든 국민의 번제물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을 다 이 큰 제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라 오직 놋제단은 내가 주께 여쭐 일에만 쓰게 하라 하매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더라 아하스 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그것을 두며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옮겨 세웠더라 아하스가 행한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누구에게 경외하고 순종할 것인가

이 기록을 보고 울지 않을 선지자가 어디 있을까. 제사장이란 자는 목숨을 걸고 왕의 명령에 반대하고, 재 가운데 무릎 꿇고 앉아 주 여호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여야 할 터인데, 되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하나님의 제단을 훼파하는 일이 앞장서고 왕에게 보란 듯이 선사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그 제단이 앗수르의 신을 예배하는 것이었음을 알고서 행한 바가 아니냐. 성소의 제단들이 뜯겨나가 방치되거나 주변으로 밀리거나 앗수르의 신을 섬기는 데에 사용되니 이를 아하스의 조상 다윗과 솔로몬이 봤다면 통탄했을진저. 다윗이 그토록 염원해도 짓지 못했고 아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아하스가 망쳐버렸다. 하나님을 치워버리고 앗수르의 신을 중심에 두었다.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두 그러했다. 울어야 할 제사장이 헤헤거린다.

왕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였다. 여호와께 잘못된 불을 드렸다가 아론의 두 아들이 죽었고 여호와의 궤를 잘못 만졌다가 웃사가 죽었지만, 아하스에게 그 일은 전설일 뿐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할 이유는 없었다.

제사장 우리야도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치 않고 아하스 왕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아니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행했다. 본디 성경의 다른 기록에 보면, 의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나 주의 천사의 모든 명령대로, 일러준 대로 모두 행하였다는 표현들이 나오는데, 이 우리야는 앗수르 왕을 두려워하는 아하스 왕의 모든 명령대로 행하였다.

역사상 고대에는 정교일치의 사회였지만, 중세를 거치며 종교는 정치 권력에 배속되었다. 물론 본문의 시기는 고대지만, 중세 이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의 종’이라 자랑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도 행하지도 않으면서 사익이나 국익에만 몰두하여 그것이 마치 하나님 나라의 이익인 양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 세밀하게 들어가 보자. 공동체를 세우고, 출발은 좋았으나 상담, 심리학, 공연 문화 등등 자꾸 여러 가지를 수용한 결과, 도구로 쓰면 참으로 아름다운 벽돌이 될 수 있는 이러한 요소들이 복음보다 우위에 올라 비극이 일어난다. 영국 IVF 창립자들은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였으나, 진리의 영역에서까지 타협이 이루어져 그들 스스로 세운 IVF를 떠나 에큐메니컬 운동 단체를 세웠다. 복음의 중심성과 생명력을 잃고 진리를 주변부로 치워버린, 중심에 무분별한 다양성의 수용을 둔 그 단체는 침잠해버렸다.

이제 나를 비춰보자. 아, 눈에 들보가 낀 나는 다른 이들의 티끌은 보면서도 나를 볼 수가 없다. 내 생각 속 지금의 나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있다. 이런 말을 하기엔 뒤가 켕기지만 이 찜찜한 들보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냥 적당히 불편하고 겉으로는 신실한 척 살아도 괜찮은가? 나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아, 이제야 들보가 하나 보인다. 두려움. 하나님보다 사람, 특히 일부 선임병들에 대한. 누군가에게는 내가 나의 하나님을 드러내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 앞에서는 숨긴다. 나중에 가보면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도. 이제는…… 어제부터 적어왔던 대로 영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자(마 10:28). 그리고 그가 나의 기쁨이심을 매 순간 확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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