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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열왕기하 4:25b-37 | 엘리사와 게하시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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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3.12.19.(화)
정리: 2023.12.20.(수)


열왕기하 4:25b-37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그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여인이 이르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니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하는지라 아이의 어머니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따라가니라 게하시가 그들보다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지도 아니하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그에게 말하여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 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이르되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니라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엘리사와 게하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왜 가는 길에 사람들과 인사하지 말라고 했을까. 그건 특정한, 또는 특별한 무언가를 할 때는 온전히 집중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날에는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확인하고 싶어도 집중의 흐름을 이어가라고 해석해서 적용할 수 있겠다. 기도와 성경 묵상을 할 때, 일터에서, 그리고 사명을 수행할 때 등 어쩌면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마음에 새겨야 할 지침이다.

살면서 잠깐이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마음이 팔려 끝내 해내지 못하거나 흐지부지 처리하고, 설령 완수했더라도 힘을 낭비하고 시간을 지체한 일이 얼마나 많았나. 벌써 수십 년째 못한 과업도 있을 정도다. 잠깐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사소한 것이니 금방 제 길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발을 잠깐 잘못 들였다가 완전히 다른 길로 빠져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며칠 전 한 기회가 찾아와 이력서를 작성했다. 참고하려고 그동안 쓴 이력서를 살펴보는데, 2016년에 쓴 것으로 저장된 이력서에는 놀라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포부와 비전에 대해서 적는데, 선교 4.0 패러다임의 캠퍼스 정착화, 연합에 헌신한 지체들과의 만남, 페스펙티브스 훈련 수료, 외국인 대상 한국어 교육 등이 적혀 있었다. 쓰고 나서는 바로 기억에서 잊었지만, 7-8년만에 다시 보니 이력서를 냈던 기관에서의 3년 동안 적은 내용들을 모두 수행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소원을 두시고 일을 행하고 계신다(빌립보서 2:13). 다만 한국어 교원 자격증은 받았지만 아직 수업은 하지 못해왔는데, 그래도 최근 한 외국인과 연결이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기대해본다.

하지만 당시의 이력서에 적은 내용 중 작품 활동을 하겠다는 내용은 여전히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 채 오리무중이다. 이력서에는 작품 활동이 “제 막연한 두려움과 게으름과의 싸움이며 스스로를 지금의 저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가꾸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 나는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꼬리를 말았고,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보다 나은 사람인지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때와 기한이 하나님의 권한에 있으니(사도행전 1:7), 그분이 원하시면 최적의 때에 최선으로 행하실 것을 믿는다. 그때가 오기까지 게으르지 않기를, 그보다 다른 길로 새지 않기를.

그런데 게하시는 엘리사의 지시를 어기고 가는 길에 지인을 만나 안부를 나눴을까.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아서 모르겠다. 하지만 게하시는 엘리사를 대리하여 그의 지팡이를 갖고서도 능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엘리사와 게하시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화가 떠오른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산 아래 있던 제자들은 자식이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도움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즉시 귀신을 쫓아내셨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엘리사는 게하시와는 달리 아이를 만나자 하나님께 기도부터 한다. 예수님은 산 아래에 모인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꾸짖으셨다. 하나님을 믿고 구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엘리사와 게하시-사람들의 차이였던 듯하다.

이어 엘리사는 게하시가 지팡이를 아이의 몸 위에 놓았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몸을 아이의 몸에 올려놓는다. 이는 스스로의 몸과 죽은 아이의 몸을 동일시한 것이다. 아이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생명을 대신 아이에게 전하겠다는, 자신이 죽어도 아이를 살리겠다는 사랑의 행동이었다. 훗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죄로 죽을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셨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죽도록 사랑하셔서 보내신 독생자의 헌신이었다(요한복음 3:16).

능력은 사랑으로부터, 사랑이신 하나님(요한일서 4:16)으로부터 나온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고 사랑하는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는가? 그래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명의가 수술에 집중하듯, 하나님의 일꾼이 연락을 차단하고 길을 가듯 몰입하고 있는가? 내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마태복음 22:3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하는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내게 주의 사랑과 그 능력을 부어주소서. 그렇게 사랑과 능력으로 섬기며 살 때, 나를 훼방하는 다른 것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주의 부르심에 충성하게 하소서. 나를 위하여 생명 다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요한계시록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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