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11.05.(화)
정리: 2024.11.05.(화)
욥기 5:1-16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나르시시스트 엘리바스가 되지 않으려고
어제 일상 속에서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리는 분을 위한 기도가 깊어졌고, 더 마음을 집중하며 쏟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식욕을 비롯한 모든 욕구가 사라진 것 같았다. 더는 육신의 욕망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일터에 묵상집을 두고 와서 성경 묵상을 하루 걸렀다. 그러자 집에 가니 악을 행하기에 발이 빨랐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깊어진 듯하다가도 어느새 하나님께 반기를 든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해야 했는데. 또한 기도가 중요하지만 기도만 해서도, 말씀이 중요하지만 말씀만 읽어서도 안 되고, 기도와 말씀을 함께 해야, 즉 영과 진리로 예배(요 4:24)해야 한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되새긴다.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건, 내가 엘리바스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다. 공감 능력 전혀 없이 그 자체로는 맞는 말을 하는 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상처고 해악일 수 있다. 게다가 엘리바스는 여러 장에 걸쳐 길게 얘기하는데, 아마 자신의 말에 자신이 취해 주야장천 늘어놓는 중인 듯하다.
‘수다쟁이 꼰대’나 나르시시스트를 겪은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런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쏟아놓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봇물 터진 것처럼 오랜 시간 말한다. 듣는 상대방이 눈으로 바닥 무늬를 쫓든, 다른 생각을 하든, 심지어 졸아도, 그보다는 본인 말의 흐름을 더 의식한다. 탄력을 받은 말은 필리버스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길게는 4시간도 이어진다. 말을 길고 많이 할수록 상대방이 힘들어한단 생각보다 자신이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는 생각에 뿌듯해한다. 완전히 자신에게 도취한 것이다.
상대방이 듣다가 반박이나 질문이라도 한마디 하면 흐름이 끊기는 것에 성을 내거나, 그걸 계기로 훨씬 더 오래 말하곤 한다. 특히 분노를 폭발시키는 지점이 하나 있다. 보통 말 속에 담긴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내용은 말하는 꼰대 자신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은데, 정작 자신은 전혀 해당하지 않는 것처럼 잘근잘근 씹는다. 그러다 누군가 당신도 그렇다고 하면, 자아를 직면하기 질색하는 이런 사람은 몇 초가 안 되어 격노하곤 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기 객관화를 못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에, 지적과 가르침의 대상은 오로지 남이다. 듣는 상대방이 아니라고 해도 엘리바스 같은 사람은 자신이 맞다고 확신하며 상대방을 괴롭힌다. 정작 자신은 괴롭히는 게 아니라 도움을 준다고 믿지만. 본문의 엘리바스는 욥을 미련하고 어리석으며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의 사고 틀, 세계관에서는 큰 잘못을 저질러야 큰 벌을 받는 게 법칙이었고, 욥이 자신의 규칙에서 벗어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강압적인 꼰대는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나 “네가 그러니까 이런 거 아냐?”와 같이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는 말을 쉽게 하곤 한다. 듣는 본인이 아니라는데 자신은 틀릴 리가 없기에 도무지 듣지를 않는다.
나는 이런 사람들 속에서 자라왔고, 내가 청종하시며 공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기 전까지 나도 이런 사람이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꾸준히 다듬어오셨다. 그전에는 내가 이런 사람인 줄도 몰랐었다.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고, 자기 객관화를 하고부터는 내게 당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언젠가 한 명 한 명 만난다면 사과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 많이 다듬어졌다고 해도, 앞서 적었듯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언제 또 옛 성품이 튀어나와 남의 위에 서서 가르치려 들지 모른다. 내게 성경에 대해서나 무언가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때 윗사람처럼 굴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집사나 가정 교사처럼 알려드려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한다. 권위와 권세를 가지고도 내게 그리하시는 성령께서 나를 지도하소서.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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