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11.06.(수)
정리: 2024.11.06.(수)
욥기 5:17-2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교회에 엘리바스가 많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교회에 엘리바스가 많다”는 말이 있다(내가 한 말이었나?). 누군가 고난받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성장시키려 하시는 거야”나 “더 기도하고 더 말씀 봐야지” 같은 말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들은 정답일지언정 해답이 되긴 어렵다(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고난받은 사람에게 있어 앞선 말들은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앙에 회의를 들게 할 수도 있다. 위로는 답을 알려주는 것이라기보다 마음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약 1:13). 원인이 어떻든 간에 시험과 환난이 찾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려움마저 최선이 되도록 선용하시는 것이지, 순서를 반대로 최선으로 이끌려고, 성장시키려고 사람에게 고의로 고난을 주는 변태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가 행복하기를, 진정한 행복을 알기 바라신다.
이런 하나님을 오해하다 못해 왜곡해서, 사랑해야 할 지체 성도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위의 따옴표 친 말들은 위로의 의도라도 있지만, 고난받는 사람에게 “네가 불순종해서 그래”라는 끔찍한 말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일부 상황에서는 이 말이 정답일 수 있다. 그러나 문의 엘리바스와 욥의 사례처럼, 역시 해답이 되긴 어렵다(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나마 이런 엘리바스 같은 사람이면 봐줄 만하다. 적어도 (나름대로) 하나님의 기준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한 거니까. 더 나쁜 예를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세상의 중심처럼 여기고,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기보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사람에게 작은 불행이라도 닥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셨다고 믿어버린다.
물론 정말로 하나님께서 자녀를 위하시고 악인에게 징계를 주실 수 있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길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며(겔 18:23)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다(딤전 2:4). 그리고 예수께서는 청중에게 당시 처형된 사람들과 대형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당신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며 회개를 촉구하셨다(눅 13:1-5). 고난받은 사람을 죄인 취급하지 말라는 전제가 깔린 말씀이다.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님을 내 편으로만 여기는 사람이 목회를 한다고 생각해보면 더 끔찍하다. 성도가 받는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의 대리자(?)인 목사 말을 안 들어서라고 단정해버리거나, 자신의 말을 따르는 걸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가르치며 성도들을 좌지우지하려고 할 것이다. 어느 지역에 재난이나 재해가 일어나면 “그 나라는 우상 숭배를 하기 때문에 태풍 피해를 받은 거다”는 식으로 설교하고는, 언론에 발언이 공개돼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단의 경우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김기동 베뢰아 계열에서는 불행이나 고난을 아예 귀신 탓으로 돌려버린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이며, 자신에게 나쁘면 불행이고, 불행의 해결 방법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라기보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에 치우쳐 있다.
어느 경우든 이 ‘엘리바스 계열’은 공감을 못하고 상황을 해석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에 치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대단히 현란한 분석과 지식으로 고통의 원인이나 해결 방안을 설명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13:2). 요즘 흔히 공감 능력이라는 말을 쓰는데, 공감하는 건 능력이라는 거다. 다시 말해, 공감 능력이 없다면 무능한 것이다. 통찰력과 정답을 제시하는 지혜가 있어도, 공감할 줄 모르면 무능하다.
내가 말을 많이 하여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기보다, 침묵하더라도 함께하는 사람,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 사랑에 애타는 사람이길 소망한다. 전에는 강단에서 사자후를 토하며 설교하기를 원했다면, 이제는 주께서 어떻게 쓰시든 불 같아야 할 때는 불 같이, 물 같아야 할 때는 물 같이, 바람 같아야 할 때는 바람 같이 활용하시기를 바란다. 정답을 고집하기보다 시의적절하게, 주께서 빚으시는 대로, 그렇게 성령의 사람이길. 사랑의 사람이길. 공감 능력에 강하길.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사역 후원 및 자율 헌금: 하나은행 748-910034-87207
↓ ♡와 [구독하기]를 눌러주세요
구독 방법:
1. 게시물 하단 댓글 쓰기 클릭
2. 카카오톡으로 로그인(또는 티스토리 가입 후 카카오톡으로 로그인)
3. 구독하기 클릭
4. '구독 중' 뜨면 구독 완료!
'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 6:14-30 | 고난 속의 내게 필요한 것은 (1) | 2024.11.09 |
---|---|
욥기 6:1-13 | 헌신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0) | 2024.11.08 |
욥기 5:1-16 | 나르시시스트 엘리바스가 되지 않으려고 (0) | 2024.11.06 |
욥기 4:12-21 | 꼰대 엘리바스 (1) | 2024.11.03 |
시편 84:1-12 |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0) | 2024.11.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