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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욥기 4:12-21 | 꼰대 엘리바스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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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11.01.-2024.11.02.(금-토)
정리: 2024.11.03.(일)


욥기 4:12-21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꼰대 엘리바스

본문은 욥의 세 친구 현자들 중 한 명인 엘리바스가 병상에 누운 욥에게 한 말이다. 그는 신비하고 영적인 체험을 말하고 있다.

그가 겪은 체험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본문을 수록한 <시냇가에 심은 나무>(IVP) 2009년 11월호는 사실일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것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 필진이 집중한 부분이다. 바로 엘리바스의 태도다.

엘리바스가 들었다는 한 ‘영의 말씀’에 딱히 틀린 말은 없다. 내용 자체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영의 말씀’의 권위를 빌려 자신이 전하는 말에 무게를 더하려는 상황과,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살펴야 한다.

엘리바스가 말을 들려주는 대상은 욥이었다. 욥은 하루 아침에 가족과 재산과 건강까지 모든 것을 잃고 누워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죄 진 것 없이 이런 고난을 받은 것에 의문과 억울함이 가득했다. 그런 그에게 모인 친구들은 위문을 하러 왔다가 상상을 넘는 처참함에 의문이 들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래서 욥의 상황을 분석하고 원인을 파악하여 자신의 관점대로 해결책을 제시하려 했다.

그중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말씀은 것처럼 권위를 세운 가르침으로 욥이 의롭지도 깨끗하지도 지혜롭지도 않다고 은연 중에 주장한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된다는 건 욥이 처한 상황을 빗대는 동시에 욥도 그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적 비유였다. 하나님 앞에선 모두가 죄인이니, 죄인이 허무하게 망하는 건 어쩔 수 없고 욥도 예외는 아니라는 말이다.

엘리바스가 전한 ‘영의 말씀’은 먼 훗날 기록될 잠언과 전도서의 내용과 흡사하다. 내용 자체는 맞는 말이고, 그럴 수 있다. 엘리바스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대면하고 교제해오지는 않은 듯하다. 하나님의 성품을 간과하는 태도를 보면 말이다.

하나님은 고난 당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시는 긍휼의 아버지이다. 온몸에서 피고름을 흘리는 욥에게 엘리바스가 한 말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신학적 분석이고, 가뜩이나 상심한 욥에게 힘을 주기는커녕 낙담시키는 말이었다. 통증이 뇌를 찌르는 와중에 들은 엘리바스의 말은 욥에게 ‘당해도 싸지’라고 들렸을 수도 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이렇게 말한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내세워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울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 거룩한 경험이 마치 욥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인 양 욥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에 매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사랑 안에서 해야 하고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마 5:16). 그런데 실수든 의도적이든 자신의 경험, 체험, 지식, 학문으로 정답인 양 가르치려는 것은, 좁은 식견을 자신 안에서 진리화‧절대화하여 모든 상황과 사람에 적용하는 ‘꼰대’ 마인드다. 또한 엘리바스의 반례에서 보듯이, 맞는 말이거나 진리라도 시의적절성을 가져야 하고 사랑과 배려로 상대방을 대해야 함은 물론이다.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다.

하물며 꼰대들이 잘못된 편견으로, 적은 경험으로 판단하고 편 가르는 경우는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가. “남자/여자는 원래 그래”, “전라도/경상도 사람은 다 그래”라는 일반화는 듣기도 지친다.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학문적 권위로 상대방을 찍어누르기도 하고, 신사도주의나 신비주의 쪽 사람들은 엘리바스처럼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면서 그 권위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겁을 주기도 한다. 지나치게 율법적인 교회에서는 성경 구절을 끌어다가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사람들을 굴복시킨다.

이런 이들의 결말이 어떨까. 바울은 말한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들은 말씀처럼 이야기하고 사람이 어찌 의롭고 깨끗하겠냐고 했지만, 정작 욥기 후반부에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시자 자신의 불의와 부정으로 자신이 가루가 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엘리바스에게 고난 받은 욥이 제사장으로서 엘리바스를 위해 기도하여 그는 살아갈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고난 받은 친구에게 고난을 더한 엘리바스와, 그런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긴 했지만) 엘리바스를 살려달라고 기도한 욥 둘 중에 누가 더 의롭겠는가?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이를 깨닫고 회개하며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나도 내가 해왔던 꼰대 발언들이 부끄럽다. 오직 사랑과 겸손한 섬김으로, 조용할 때는 침묵하고 주께서 말하게 하신 때는 말하기를, 그렇게 살아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드린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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