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9.09.(월)
정리: 2024.09.09.(월)
잠언 15:20-33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 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성경이 말하는 교만과 겸손
어제 방송을 하며 최근 묵상하고 있는 잠언을 이야기했다. 잠언은 주변에서 미련하게 보아도 의의 길, 바른 길을 가는 것이 지혜고 명철이며, 약삭빠르게 남을 속이거나 해쳐서 빠르게 성공하는 건 게으르고 악하다고 규정한다고. 오늘 본문 21절에서도 “무지한 자는 미련한 것을 즐겨 하여도 명철한 자는 그 길을 바르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정도(正道)를 걷는 게 참 현명함이다.
그리고 본문과 아울러 잠언 전반적으로 겸손과 교만을 대조하고 있는데, 둘을 가르는 차이는 남의 말을 듣느냐 안 듣느냐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만 하며, 부모를 업신여기고, 훈계에 분노를 발하며, 의논하지 않는다. 형식적인 회의를 한다고 해도 자기 연설 시간으로 삼는다. 사람 말을 안 들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리 만무하다.
반면 겸손한 사람은 경청하는 귀가 열려 있고, 견책이라도 달게 받으며,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고 많은 지략을 모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듣고 순종한다. 자신의 결정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나는 어떠한가. 오늘도 일하면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지시 사항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쉽게 잊고, 어떠한 상황에서 물어보기보다 혼자 판단해서 처리하다가 일을 그르친다.
하나님께 대하여도 부끄러움이 많다. 지난주 설교 본문인 신명기 8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5월부터 진행된 고소 사건은 나를 겸손케 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께 더 의지하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소송이 마무리되고 있는 요즘, 다시 내 욕망에 끌리는 대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나를 본다.
어제 설교 본문인 신명기 9장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하게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신 9:7) 나는 광야에서조차, 인생의 바벨론 포로기라고 부르던 근 서너 달 동안에서조차 늘 하나님께 거역해왔다. 낮아지고 하나님을 더 의지했다고? 세 달 내내 그랬나? 아니다. 본래부터 부패한 마음은 늘 하나님을 거역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늘 거역하는 백성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하셨으며, 내게도 그러하신다.
한편 신명기 9장에서 지난날을 술회하는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시내 산(호렙 산)에 올랐다가 내려오자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고 있던 사건을 되짚는다(신 9:8-21).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를 의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시내 산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하면서, 그곳에 올라간 모세가 오지 않자 불안해했고, 결국 우상을 만들어낸 것이다(훗날 사무엘을 기다리다 제사장의 자리까지 넘본 사울 왕처럼). 하긴 40년 동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늘 함께 해왔는데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의식 없이 별 감흥 없던 이들이었다. 그전에 이집트에서 제국을 흔든 재앙들을 보았고 갈라진 홍해 사이를 건넜음에도 쉽게 잊은 사람들이었다. 교회에서 의지하던 교역자나 선배, 친구가 떠나거나 인간 관계가 어긋나도,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실망할지언정 자신이 직접 만난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해야 한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나의, 성도들의 자세다. 모세가 40일 뒤에 돌아온다는 말 없이 않고 올라가서였는지 사람들은 불안해했고, 나중에는 모세도, 하나님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오늘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나는, 우리는 어떨까. 언제 올지 알 수 없으니까 아예 안 오는 것처럼 방종하며, 시내산 아래 백성들처럼 자기 우상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미련한 것을 즐기는 무지한 자처럼. 하지만 모세는 산에서 내려왔고, 예수님도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신다. “여호와께서 또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았노라 보라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13) 모세는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전(目前), 즉 하나님의 눈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말한다(신 9:18).
그런데 앞서 인용한 신명기 8장 2절과 9장 7절에는 공통된 표현이 나온다. 바로 기억하라는 명령이다. 하나님께 반역한 나의 죄악과 아울러 고난의 기간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집 밖에 장막을 치고 일주일 동안 거주하며 광야 생활을 기억하라는 장막절을 제정해 주시기까지 한다. 기쁘고 즐거운 것만 기억하지 말고, 고난을 빠져나왔어도 당시를 기억하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고난 중에 함께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의식해야 한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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