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3.01.05.(목)
정리: 2023.01.05.(목)
출애굽기 1:15-22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산파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 마침내 바로는 모든 백성에게 명령을 내렸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강물에 던지고, 여자 아이들만 살려 두어라." (새번역)
나의 묵상: 믿음의 좁은 길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나란히 할 경외의 모습이다. 이들은 눈앞의 권력과 칼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위기와 유혹의 순간에 가룟 유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고 떠났지만, 좁은 문을 가는 이들은 가야바와 빌라도 앞의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처럼 의연했다. 예수님을 닮은 이들은 더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모세를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고 평가했다. 모세 출생 직전에 바로의 위협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사랑한 십브라와 부아 역시 히브리서에 이름이 기록될 만하다.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제국 활제의 권세보다 하나님을 택하였다. 이들은 사자굴에 던져져도, 풀무불 속에 들어가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고, 습관을 따라 기도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건짐을 받았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건져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꺾지 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 십브라와 부아도 바로의 위세에 죽더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은 이들이었다. 이후 예수님을 따르며 불과 물과 그물과 밧줄과 사자와 십자가와 칼과 창과 총에 죽어간 이들이 구름과 같이 허다하게 있어왔다.
한편 엔도 슈사쿠의 역사 소설 『침묵』이 생각난다. 일본 막부가 가톨릭을 박해하며 신도들에게 예수님을 새긴 동판을 밟으라며 배교 여부를 판단한 후미에를 시행할 때, 주인공 신부가 들었다는 “밟고 가라!”는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이었을까. 자신이 밟지 않으면 성도들이 처형되어야 한다는데. 나는 죽어도 되지만 저 사람들은?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고등학생 때 교회 수련회에서 후미에를 재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모두 종이로 그린 예수님 얼굴을 밟지 않고 신앙을 고백했다. 하지만 이후 조원들이 실제 상황이었으면 밟았을 것이라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후미에를 연출한 장로님을 찾아가 혼자서 한 번 더 서 보겠다고 했다. 방 안에 주님과 나 둘뿐이었고, 나는 한참 동안 마음을 고백하고, 밟지 않고 돌아서서 나왔다.
그때는 나 혼자였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무작위 음악 재생을 한 이어폰에서 동방현주의 <사명>이 흘러나온다. 사명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겠다는 고백. 그런데 이 고백을 부른 동방현주님은 내가 참석한 교회 집회 현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님이 정말로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냐고 하신다면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지만, 어린 딸을 먼저 거두어가신다 해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냐는 물음에는 답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답을 할 때까지 이 곡을 부르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 길로 신학을 공부하러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내게 자신을 주신 주님께 나를 드릴 수 있지만, 가족을 드릴 수 있는가? 아,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게 아들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쳐서 모든 믿는 사람의 본이 되었다. 그래, 가족을 잃은 욥의 고백으로 말하니, 내 생명은 물론 가족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로다.
물론 일상의 작은 선택마저도 하나님이 아니라 내 욕망을 따르는 나다. 작은 일에서부터 충성하자. 내 하나님의 이름 영화롭도록. 더 이상 그분의 이름 더럽히지 않게.
하지만 언젠가, 어쩌면 근래에 또 나는 무너지고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하지만, 『침묵』의 신부가 자신의 신앙을 저버렸다고 좌절했어도, 여전히 가쿠레키리시탄이란 이름으로 일본에서 숨어서 신앙을 지켜온 ‘남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지키셨듯,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일으키셨듯, 박해자인 사울이 박해받는 바울이 되었듯, 실패자를 또 다시 새롭게 하셔서 쓰시는 하나님께, 나도 주님이 내민 손을 포기하지 않고 잡으려 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사람이 사람을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고치는 걸 넘어 새롭게 하신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
동방현주님은 여전히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을 향한 고백을 담은 새 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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