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3.01.04.(수)
정리: 2023.01.05.(목)
출애굽기 1:8-14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그 왕이 자기 백성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의 수가 더욱 불어날 것이고, 또 전쟁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그들이 우리의 원수들과 합세하여 우리를 치고, 이 땅에서 떠나갈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어서,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은, 바로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억압을 받을수록 그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몹시 싫어하였고, 그들을 더욱 혹독하게 부렸다. 이집트 사람들이,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이나 밭일과 같은 온갖 고된 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괴롭히므로, 그들의 일은 매우 힘들었다. (새번역)
나의 묵상: 인종 갈등, 역사, 그리고 하나님
비교가 될지는 모르지만, 유럽 내 아프리카‧아랍계 이주민들의 확산세가 눈에 들어왔다. 독일‧프랑스 백인들은 자녀를 1명 낳을까 말까 하나, 이주민들은 관습을 따라 많은 자녀를 낳는다. 이로써 인구 비율 역전 현상이 일어나려 하고, 점점 늘어가는 이주민들은 기존 정착민들과 사회적 갈등을 빚어가고 있다. 같은 땅에 사는 다른 이들 간의 불편한 공존이 커지는 이유는 모순적이게도 유럽이 지향해온 가치 중 하나인 관용과 존중의 어설픈 적용 때문이었다. 이주민들은 유럽에서 관용과 존중을 받기에 그들이 고향에서 체화한 가치관을 바꿀 필요가 없었고, 바꿀 생각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개인이 중요하고 무분별하게 자유로운 유럽 백인들과, 가족이 중요하고 종교적인 무슬림 이주민들이 서로를 경악스럽게 볼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전자는 후자를 향해 관용이 없다고 지적하고, 후자는 전자를 향해 이러한 지적과 유럽 풍속도에 대해 자신들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갈등의 두 극단이 빚은 비극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이었다. 프랑스의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이슬람 선지자 무하마드를 조롱하는 만화를 실었다가, 분개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로 직원들이 사망하였다. 유럽 백인들의 ‘자유’로 ‘해도 되는’ 개념은 무슬림의 ‘신성불가침’ 영역을 건드렸고, 무슬림에게 ‘하면 안 되는’ 행위를 한 주간지에 극단주의 이슬람 원칙을 따라 보복과 처형을 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누군가는 용인할 수 없는 범죄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징벌해야 한다고 했다. 양쪽 모두에서 서로를 향해서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테러가 용인할 수 없는 범죄요 징벌받아 마땅한 행위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하마드 모욕이 용인할 수 없는 범죄요 징벌받아 마땅한 행위였다.
미국의 경우는 어떨까. 물론 인종 갈등이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지만, 미국은 치열한 역사를 거쳐온 과정에서 유럽보다는 사회 통합을 이루었다. 같은 땅에서 서로를 용납할 수 없다면 아브라함과 롯처럼 갈라서라는 무슬림 말콤 X의 흑백분리주의 대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창한 상호 존중과 유화주의를 끝없이 추구해온 결과일까? ‘이주민들의 나라’이자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은, 각자의 가치를 존중한다면서도 그 위에 국가주의의 뚜껑을 덮었다. 어떤 인종이든, 어떤 사상을 가졌든, 미국이라는 나라를 최우선으로 하라는 주의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게는 어느 인종이든 ‘나는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하다.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옷이나 모자에 국기와 USA를 새기기를 즐겨 한다. 반면 유럽 거주 이주민 중에는 ‘프랑스인’이나 ‘독일인’보다 ‘무슬림’이 더 강한 정체성이다.
본문의 요셉을 모르는 새 파라오는 요셉 당시가 아닌 다른 민족이 세운 왕조의 지배자다. 기존 지배 민족을 밀어내고 새로운 패권을 잡은 그들에게, 히브리 정체성을 수백 년간 유지하며 인구가 증가하는 이주 정착민들은 충분히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처럼 이집트를 차지하려고는 하지 않더라도,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 땅에 속하거나 인근 민족들에게 동요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집트는 현재 유럽이나 미국보다 최악의 수를 둔다. 존중도 유화도 아닌 억압을 택한 것이다. 나중에는 섞이거나 녹아들지 않는 이들이 알아서 떠나주겠다고 했는데, 이집트는 노예 노동력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과, 이집트의 위세와 자존심을 열국에 세우고자 고집을 부렸다. 이들의 선택은 오히려 히브리의 하나님이 강대하다는 걸 열방에 선전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리일에 더 알아보니 새 왕조는 기존 이집트인들로, 식민 통치를 하던 힉소스 민족을 몰아내고 이집트를 되찾은 것인데, 힉소스와 이스라엘 모두 셈족이기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셈족 연합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핍박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새 왕조가 이스라엘이 온 이집트인들은 물론 근동 지역 모두를 살린 요셉의 민족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동안 반란 한 번 꿈꾸지 않은 민족이라는 걸 알았다면, 폭력보다 대화 요청에 응했다면 어땠을까.
오늘날 남북 분단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리고 나는 어떤 자세로 사람들을 대해야 할까. 누군가를 적대하지 않고, 나를 적대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E. 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는데, 역사를 배워도 현재를 대하기가 어렵다. 나는 현재를 처음 살기 때문이다. 모든 시간과 사건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상황과 때에 맞는 지혜 주시기를. 하나님을 경외하여 지혜롭게 행하기를. 그리고 세속의 국가주의를 넘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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