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5.03.04.-05.(화-수)
정리: 2025.03.04.-05.(화-수)
호세아 13:1-16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그들이 먹여 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사자 같고 길 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 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눈 앞에서 숨으리라 그가 비록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곧 광야에서 일어나는 여호와의 바람이라 그의 근원이 마르며 그의 샘이 마르고 그 쌓아 둔 바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로다 사마리아가 그들의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서뜨려지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라지리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왕께 구할 것
구하여 받아도 복이 아닐 때가 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던 때가 있었다. 보통 사사 시대라 부르는 이때는, 각자가 하나님의 율법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을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태초의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자 한 이유와 같은 죄의 뿌리에서 나온 실상이었다.
자신을 기준 삼은 이들은 점차 자신을 위해 타인을 해치고, 서로 다른 가치관과 나를 위해 남을 짓누르는 욕망의 충돌로 공동체가 분열되었다. 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에 등장한 사조가 아니라 고대에도 있던 것이다.
사사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하지 않았다. 대신 나, 내 가족, 내 부족, 내 지파만을 챙겼기에 서로를 대적했고,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국력 약화를 가져와 숱한 외세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다. 국난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진정한 왕의 통치를 거부해서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타국처럼 왕정 국가가 아니라 부족 연맹체였기 때문에 약한 거라고 믿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따를 생각은 없으면서 하나님께 하나님을 대신할 왕을 구했다. 자녀가 부모를 거역하다 못해 부모에게 부모를 대신할 다른 부모를 구해달라고 요구한다면,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마음이 무너지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날 것이다.
하나님도 매우 노하셨지만, 그래도 이들에게 이들의 기도대로 왕을 주셨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이들에게 왕을 주시면서도 왕이 하나님을 경외토록 율법과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왕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통치를 따르며 타국처럼 백성들을 함부로 부리지 못하게 하셨다. 첫 번째 왕이 몰락하고 다윗이라는 왕이 세워져 하나님을 경외하자, 그제야 이스라엘 왕조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대로 가면서 왕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니, 끝내 하나님께서는 왕을 폐하시고 사사 시대의 외적들보다 더 강력한 제국의 침공을 허용하셨다. 백성들은 제국의 말발굽에 아예 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사사 시대 이전, 이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로 이집트를 빠져나와 광야 생활을 할 때였다. 이들은 코로나 19 유행 당시 병원에 격리된 신천지 신도들이 병원 관계자들을 하인 부리듯 했던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공동체를 섬긴 모세를 안하무인의 태도로 대했다. 목마르니 물을 달라, 배고프니 밥을 달라, 끌어냈으니 책임져라,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게 났겠다 등등. 이들은 불평하며 모세를 돌로 치고 정말로 자신들을 노예 삼던 이집트로 돌아가려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오아시스를 주시고, 만나라는 먹을 것을 하늘에서 내려주셨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을 둘러 모든 것을 말려버리는 태양으로부터 보호하셨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급격히 하강하는 사막의 밤 기온에서 지켜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책임을 다하고 계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만나만 먹으니 질린다며 고기를 요구했다. 감사를 잊고 하나님을 시종 삼은 이들에게도, 왕이신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잔뜩 제공해주셨다. 이스라엘은 고기를 배불리 먹었으나, 자신이 자신의 왕이 되고자 한 이들의 이에 고기가 남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치셨다.
구하여 받는 것이 재앙일 때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노하신 광야에서와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기도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솔로몬 왕의 기도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전자의 기도는 앞서도 적었듯이 패륜적 기도였다. 이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필요를 구하면서도 하나님을 필요없다 여겼다.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구한 것도 자신들이 보기에 필요한 것이었다. 정작 이들이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솔로몬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정성을 다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들을 잘 지도하고자 지혜를 구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과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왕이라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자격 있는 왕으로 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기뻐하시면서 나라를 다스릴 지혜와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이것저것 더하여 주셨다.
기도 응답의 재앙과 복을 가르는 기준은, 구하는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궁리하며 나를 위해, 나의 먹고사니즘을 위해 하나님께 구한다면, 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두고 하나님을 유능한 부하로 부리려는 지독한 반역적 태도일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를 충실히 따르며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신다.
요즘의 나는 여러모로 궁핍하다 보니, 이것저것을 하나님께 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르려는 의지는 별로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슬퍼하고 노하실 만한 일을 매일같이 저지르고 있다. 그러면서 뻔뻔하게 필요한 것을 구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길에서 엇나가면서 하나님께 구하여 무언가를 받아낸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 것이다.
이제는 그립다. 내가 보기에 하나님 나라 사역에 필요한 건 이러저러한 것들이라고 판단하는 게 아닌, 먼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고, 그럴 때 구하거나 구하지도 않았는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신나는 나날들이. 이런 일상을 요즘 2 청년부 담당 교역자의 삶에서 보고 듣는다.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붙드는 아름다운 인생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것은 명징하다. 먼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동행을. 우리나라의 역사 교과서에도 실린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하다가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나에 대해 참 좋은 책을 썼구나. 너는 나에게서 어떤 보답을 원하느냐?” 아퀴나스는 단 한 줄로만 답했다. “주여, 오직 당신만을!”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지점은, 광야에서와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는 걸(빌 3:19) 드러내지 않더라도, 겉으로는 선한 일에 필요한 척 위장하는 경우다. 베다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며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쏟아붓자, 가룟 유다는 이 무슨 낭비냐며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은 진심이 없었다. 그저 돈이 아까웠을 뿐이었고, 예수님보다 돈이 좋았을 뿐이었다.
한편 이 사건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도들 중 재정을 맡은 유다가 그동안 횡령을 해왔음을 밝힌다(요 12:3-6). 마리아가 향유를 붓지 않고 판 돈을 예수님께 드렸다면, 유다가 그 돈을 맡아 일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겠지만 다른 일부는 자신이 챙겼을 것이었다. 즉 유다가 아쉬워한 이유는 자신이 훔칠 돈이 눈앞에서 사라져서였다.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 운운하며 자신의 의도를 포장했다. 돈의 일부를 구제에 쓴다 해도, 자신의 횡령을 덮을 위장막에 불과했다. 자신의 부당한 사익 추구라는 더러운 욕망을 감추려고 선한 일을 내세우다니, 차라리 대놓고 패륜을 저지른 광야에서와 사사 시대 이스라엘이 나아 보일 지경이다.
게다가 일부를 감춘다는 점에서 자신의 전부인 향유를 드린 마리아와 대비되고, 반대로 전부를 드린다 했으나 일부를 감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는 유사하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인지도와 영향력을 목표로 했지만 겉으로는 헌신을 표방했다. 고귀한 헌신인 척했지만 실제로는 헌신을 팔아 지위를 사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다가 패망했다. 나아가, 정말로 감사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더라도, 그러한 하나님과 동행한 역사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자랑으로 삼다가는 크게 걸려 넘어질 것이다.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예수님은 당대의 유대인들이 ‘고르반’이라 하여 하나님께 바쳤다면서, 하나님의 일에 쓸 거라면서 헌물과 헌금을 구별해놓고, 실제로는 부모에게도 봉양하지 않고 자신이 쓰는 실상을 지적하신 바 있다(막 7:10-13). 유대교의 썩어져 가는 구습에서 벗어나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처럼 겉과 속이 달라서는 안 됐다. 가룟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은과 함께 망해버렸다(행 8:20). 자신이 사역자라며 온갖 지원은 받아놓고, 이를 누리며 나눔에는 인색하다면, 인생과 재정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인생과 재정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사역을 빌미로 속여 재물을 취하는 거짓 선지자요, 위장하는 횡령범 가룟 유다일 것이다.
나는 어떠할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셔도 나는 할 말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책임지시고 내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셨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드렸는가. 말로나 기도로나 찬양으로는 그렇다고 해도, 마음의 이면과 삶에서 내 것을 따로 챙기려 하거나, 사역을 표방하며 재정을 기대하거나, 후원을 받아도 감사하거나 후원받은 목적대로 살아가지 않고, 남 보이기 부끄럽고 허튼 짓을 한다.
오늘(3.5) 일하는데 업장에 켜놓은 찬양 중에 이런 가사가 들렸다. “내 모든 것 받기 합당하신 분”(아이자야 씩스티원, <삶의 예배>에서) 아, 그렇구나. 하나님은 그 자체로 내 모든 것 받기 합당하신 분이지. 그런 분이 내게 모든 것을 주셨지. 주께 나를 드리는 건 계산할 일이 아니지. 그리고, 이미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부인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셔서, 나는 전부 그분의 소유지.
다시 내가 누구인지, 누구에게 속했는지, 누구의 자녀이고 백성인지를 되새긴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시고 지금도 내 인생을 책임지시는 분이 누구신지, 누가 나의 주시며 왕이신지를 기억한다. 나의 자그마한 왕국을 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철저히 부순다. 다시 아퀴나스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길 조심스레 바란다. 언젠가 담대하고 확신 있게 삶으로 고백하기를.
아퀴나스의 갈망이 나의 갈망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참 하지 못하지만 하고 싶은, 올해 1월 1일 송구영신 예배에서 받은 성경 구절을 적어 본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보다, 내가 분석하고 예측한 것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주 당신을 바랍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사역 후원 및 자율 헌금: 하나은행 748-910034-87207
↓ ♡와 [구독하기]를 눌러주세요
구독이 안 될 때는?
1. https://parkhagit.tistory.com/ 주소로 접속해서 [구독하기] 클릭!
2. 카카오톡으로 로그인 + 티스토리 가입을 [확인] 두 번 클릭으로 단숨에 끝내기!
3. 다시 [구독하기] 클릭!
4. [구독 중] 뜨면 구독 완료!
(https://parkhagit.com/ 주소에서는 구독이 되지 않는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세아 14:4-9 | 영혼의 깊은 밤중에 (0) | 2025.03.23 |
---|---|
호세아 14:1-3 | 그가 위대하신 이유, 끝까지 사랑하기에 (0) | 2025.03.14 |
호세아 12:7-14 |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진노 중에라도 충성을 (0) | 2025.02.21 |
호세아 11:12-12:6 | 책상에서 일어나 문 밖 세상으로 (0) | 2025.02.13 |
마태복음 9:14-17 | 자유케 하는 진리 (0) | 2025.02.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