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5.02.11.(화)
정리: 2025.02.13.(목)
호세아 11:12-12:6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개역개정)
에브라임은 거짓말로 나를 에워싸며, 이스라엘 가문은 온갖 음모로 나를 옥죄고 있다. 유다 족속도 신실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고 살며, 종일 열풍을 따라서 달리고, 거짓말만 하고 폭력만을 일삼는다.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에는 기름을 조공으로 바친다. 주님께서 유다를 심판하시고, 야곱을 그의 행실에 따라 처벌하실 것이다. 그가 한 일들을 따라 그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이다. 야곱이 모태에 있을 때에는 형과 싸웠으며, 다 큰 다음에는 하나님과 대결하여 싸웠다. 야곱은 천사와 싸워서 이기자, 울면서 은총을 간구하였다. 하나님은 베델에서 그를 만나시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주는 만군의 하나님이다. '주'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분의 이름이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 (새번역)
나의 묵상: 책상에서 일어나 문 밖 세상으로
지난주 서울대학교에서 1박 2일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와 서울대학교 기독교수협의회 후원으로 열린 <바로 보기, 바로 살기> 북 콘서트에 다녀왔다. 개혁주의 3대 신학자 중 한 사람인 헤르만 바빙크의 『계시 철학』(도서출판 다함), 그리고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새물결플러스)를 읽은 서울대학교와 카이스트 대학원생들이 발제했다. 초청 특강은 작년에 진행한 독서 모임의 선정 도서인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IVP)을 쓴 강영안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님이 진행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분들, 그리고 예상 밖의 참가자인 이단상담아카데미를 수강하는 목사님과 재회하고, 처음 만난 분들과도 유익한 교제를 나누었다. 나는 발제에서 나온 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내재된 종교성’, 바빙크의 ‘본유’ 개념에, 최근 묵상하며 인용한 블레즈 파스칼의 ‘공백(God-shaped vacuum)’ 개념을 연결하여 질문하는 등 오랜만에 학문적 즐거움을 만끽했다. 셋 모두 비슷한 개념으로, 모든 인간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물론 타락한 인류는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은 한, 이 본성이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다). 세 학자의 성향과 신학적 지향성은 다르지만, 셋 모두 모든 인간의 깊은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대하니, 하나님을 지적으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내가, 실은 관념적인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파스칼‧슐라이어마허‧바빙크 모두 영혼으로, 몸으로, 삶으로 하나님을 알았기에 공백이든 본유든 말해왔을 것이다. 나도 ‘동의’하는 바지만, 정작 내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따르지 않고 머리로만, 입으로만 충성하고 있었다.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대표하는데,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아는 말은 북이스라엘이 거짓과 속임수를 저지른다는 말이다. 북이스라엘은 북동쪽으로는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지만, 남서쪽으로는 이집트에 조공을 바쳤다. 얼핏 보면 강대국들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한 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내용이 자세히 나온 열왕기와 역대기를 보면, 균형 외교는커녕 줏대 없이 강대국들에 빌붙으며 휘둘리는 모습이란 걸 알 수 있다. 앗시리아와 이집트가 달라는 대로 내어주면서 두 나라의 풍습과 화려한 겉모습을 무분별하게 따라 하니,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란 정체성은 사라지고 있었다. 또한 앗시리아와 이집트가 오늘날 미국과 중국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앗시리아에는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척, 이집트에는 앗시리아와 동맹을 맺지 않은 척 거짓말을 했다. 양다리를 걸치는 연애 중인 A라는 사람이, 상대 B에게는 상대 C와 헤어졌다고 하고, C에게는 B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결국엔 북이스라엘은 살아보려고 꼼수를 쓰다 걸려, 분노한 앗시리아의 침공을 받아 망할 위기에 처한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이래 왔다. 그동안 소시오패스들이 이런 거짓말을 한다고 가르쳐 왔는데, 내가 이러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북이스라엘과 오늘의 내가 바람을 먹으며 열풍을 따라 달린다고 하신다. 바람을 먹어봤자 영양가 없어 헛배부르고, 결국은 굶어 죽을 것이다. 사막 지형에서 열풍을 피하고 걸어 다니기만 해도 지치는데, 반대로 열풍을 향해 달려가는 건 자살 행위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양강 굴욕 외교를 하며 자국민들을 괴롭게 했고, 그렇게 나라가 망해가는 것도 모른 채 간과 쓸개를 다 빼주고 있었다. 내 삶이 고단하고 빈궁하며 공허한 건 이 때문이었다.
남유다 왕국도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지 않고 갈팡질팡했다. 북이스라엘과 동맹할까, 전쟁할까? 앗시리아와 동맹할까, 전쟁할까? 이집트와 동맹할까, 전쟁할까? 이게 좋아 보이는데 이걸 해볼까? 저걸 하면 나라가 강해질까? 여러 고민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했겠지만, 정작 ‘하나님을 따를까?’, ‘하나님은 무슨 뜻일까?’를 묻지 않고 선택지에도 넣을 생각을 안 했다. 내가 그랬다. 반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기 전 통일 왕국의 왕 다윗은 이런 노래를 남겼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한편 다윗보다도 훨씬 이전,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의 조상인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남의 것을 속여 취하는 자였다. 야곱이란 이름의 유래인 ‘아카브’는 ‘발꿈치를 잡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속이다’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짓과 속임수로 자신을 채워온 야곱이, 도리어 속임수에 당해 자신의 인생을 고난에 처하도록 허용하셨다. 그러다 야곱은 시험의 끝에서 하나님의 사자(angel)를 만나고, ‘하나님의 승리자’란 뜻의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부여받는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정직하게 ‘항상’ 하나님을 바라라고.
본문을 수록한 <시냇가에 심은 나무>(IVP) 2010년 3월호는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은 속이는 야곱을 만나서 고치신 것처럼, 신실하지 못한 자신의 백성을 고치길 원하십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처럼 속이고,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부분은 없습니까? 헛된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는 사람으로 세워지도록 간구합시다.” 내가 그러기를. 나는 스스로 고칠 수 없으니, 주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내가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오직 주님만이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주께서 원하시고 뜻하신 바를 이루소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성취,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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