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19.08.21.(수)
정리: 2021.02.26.(금)
히브리서 7:1-10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에, 그를 만나서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첫째로,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요, 다음으로, 그는 또한 살렘 왕인데, 그것은 평화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언제까지나 제사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멜기세덱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족장인 아브라함까지도 가장 좋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바쳤습니다. 레위 자손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맡는 사람들은, 자기네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비록 그 백성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율법을 따라 십분의 일을 받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그들의 족보에 들지도 않았지만,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 사람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법입니다. 한 편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십분의 일을 받고, 다른 한 편에서는 살아 계시다고 입증되시는 분이 그것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까지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십분의 일을 바친 셈이 됩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에는,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 아브라함의 허리 속에 있었으니 말입니다. (새번역)
나의 묵상: 고통의 수용
멜기세덱과 같은 한 별다른 왕이자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 속에서는 그리스도가 나를 온전히 다스려 주시기를 바란다.
왜 그런가? 이 숭고해 보이는 소망 뒤편에 지극한 자기 중심성을 본다. 의와 평강의 왕이신 예수께서 나를 다스리시면, 내가 올곧게 행하여 정죄감으로부터 자유를 누리며 해방감을 느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불안과 괴로움이 걷히고 지극한 평강이 흔들림 없이 이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의문을 붙일 수 있다. 바랄 수 없는데 바라고, 기뻐할 수 없는데 기뻐하고, 평안할 수 없는데 평안하여 이 절망과 슬픔과 불안의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야 하는 건 마땅히 바랄 게 아닌가? 내가 힘드니 도와달라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가 자연히 하는 기도 아닌가? ……라는 반박 말이다.
그러나 요즘 하나님은 내게 더 혹독한 걸 가르치신다. 하나님-성도의 주고받는 관계를 넘어, 그리스도와 점점 더 겹쳐지는 연습이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한 것처럼, 2012년 기연 회장이 되며 기도할 때, 거절 받을 때 내가 사랑하는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이 기간에도 고통으로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저점 더 그분과 하나 되고 있다. 아버지와의 단절과도 같은 먹먹함과 괴로움도 일면 맛보는 듯하다.
고정희 시인의 말처럼, 고통과 살 맞대고 살자. 벗어나고 싶었던 고통을 수용하며 가자. 그렇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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