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10.05.(토)
정리: 2024.10.06.(일)
고린도전서 8:1-13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와 전 세대로 퍼지면서, 다양한 신앙적 전통과 관점이 나타났다. 굉장히 보수적인 입장에서부터 너무나 자유로운 입장까지, 각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다르거나 낯선 신앙의 표현을 볼 때,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고, 심지어 ‘저건 기독교가 아니야’라고 마음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최근 예람워십의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라는 곡이 온라인에서 논란이 되었다. 이 곡은 음원 사이트에서 1위까지 기록하여 일반 대중에게도 인기를 얻었다. 그러자 일부 기독교인들에게서 곡의 가사에 ‘하나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 ‘찬양’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이에 여러 사람과 목회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관련한 여러 댓글에도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에스더에도 하나님이란 단어가 안 나오는데 성경에서 빼야 하냐며 뭐가 문제냐는 입장부터, 예람‘워십’이 세상 노래(?)를 해서 정체성을 흐렸다는 입장까지 다양했다.
나는 ‘찬양’이라는 단순화된 장르명(?)을 넘어서도 ‘교회 음악’이라는 범주에 갇히는 용어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고, ‘교회 음악’과 ‘세상 음악’(?)을 칼같이 구분하는 것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교회에서,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노래 주제에는 꼭 ‘경배’만 있는 게 아니란 현실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고 본다. 실제로 교회에서는 경배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감사, 회개, 결단은 물론, 서로를 향한 축복과 교제의 노래도 부르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마음’과 ‘쓰임’이라고 생각하는데, 서로를 축복하는 시간이나 군 지체 파송 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자며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를 부르는 건 문제 될 게 없지 않을까? 주께서 행하신 일을 찬양하며 헌신을 다짐하고 고백하는 <내 삶을 깨뜨립니다>를 입으로는 불러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면, 이보다야 훨씬 낫지 않나.
고등학생 때 나는 혼자 기도하면서, 나중에 교회 집사라고 들었지만 대중 음악을 하는 가수 윤도현의 <사랑할 거야> 후렴구를 “사랑합니다”로 바꿔서 하나님께 부른 적이 있다. 나는 하나님께 진심이었고, 하나님께서 내 고백을 소위 ‘세상 노래’를 따다가 불렀다며 받지 않으셨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형제 사랑이라고 말한다. 음식 자체에는 죄가 없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라 해서 먹는다고 타락하거나 영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를 잘 모르는 연약한 지체가 놀라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그럴 수 있어요?!”라고 반응한다면, 어리석고 잘 모른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단속하라는 게 바울의 입장이다.
나는 온라인에서 벌어진 여러 논란에서 공부깨나 했다는 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지식이 부족하여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지체들을 배려하지 않고 무식하다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을 수년 동안 봐왔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자유보다 형제를 위해 종이 되기로 했고, 심지어 영원히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까지 각오한다. 지식만 가지고 남을 판단한다면 교만한 고린도교회나 예수님께 책망받은 에베소교회(계 2:1-5)와 다를 바가 없다. 형제를 사랑하여 절제하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 동료 사도인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이야기로 돌아와서, 음식 자체가 죄가 없듯이 곡 자체는 죄가 없다. <창조의 아버지>가 신사도 진영에서 지은 곡이라 해도, 부르는 우리가 신사도주의적인 해석 없이 가사 그대로의 의미로 부르는 걸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나 <창조의 아버지>가 노골적으로 세속 가치관이나 신사도주의를 반영하지 않기도 하고.
그러나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 조심해야 한다. 내가 윤도현 노래를 홀로 부르지 않고 예배 시간에 찬양을 인도하며 회중과 함께 부르자고 한다면, 내 의도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걸 조금은 양보하고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곡을 고르는 것이 좋다. 정말 원한다면 독재적으로 밀어붙이거나 교만하게 가르치려 들지 말고 천천히 대화와 섬김으로 설득해가야 한다.
지식이 많든 적든, 믿음이 크든 작든,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은 혼자 걷지 않는다. 함께 가야 할 우리이기에, 잘난 사람 혼자 치고 나가는 게 아니라 큰 사람일수록 여린 사람을 챙기고 섬기며 모두가 함께 나아가야 한다. 잠언의 지혜를 빌려 말하자면, 이것이 오히려 더 빨리 가는 지혜의 지름길이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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