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19.01.07.(월)
정리: 2022.12.16.(금)
마가복음 1:40-45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주께서 원하시니, 마른 뼈가 살아나리
주께서 원하셔야 낫는다. 주께서 원하신다. 나도 원한다. 내가 낫는다. 내가 ‘나음을 입었다.’ 무기력과 만성적 절망에서 일어난다.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어쩌면 해야 하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끌어당긴 건지도 모른다. 나를 몰아붙이게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정작 부딪쳤을 때, 곧바로 포기할 수도 있다. 그만큼 두려움도 있다. 막연한 대상에 대한 공포. 하지만 가짜 뉴스의 생산자들이 이러한 공포를 이용하지 않는가. 어제 만난 윤지혜 자매의 말대로, 정작 시작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계획을 무리하게 세운 건 아닐까? 단기간에 끝낼 수 있을까?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문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발을 들이기도 전에 나를 잡아 끌어내리는 질문은 끊어버리기로 한다. 어제와 오늘 아침 이런 문구를 꾸려 봤다. “남들은 내 자리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견고하고 영원한 반석을 디디고 있다. 남들은 내가 취업에 실패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 실패한 게 아니다.” 물론 지금도 멀리 보이거나 확연히 보이는 건 아니다. 다만 눈앞의 등불처럼 선명하다. 사방이 캄캄하지만 믿고 의지할 건 내 손의 등불밖에 없다. 이대로 가야지 별수 없다. 실은 이 주의 인도가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다. 다른 것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이미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발견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주님께서는 온전한 길을 보이시려고 내 다른 모든 것들을 차례로 거두셨다. 오직 예수만 남는 것.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
물론 하루 이틀 이랬다고 지속하는 게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내 시선과 마음을 잡아끌려는 것들로부터 내 마음을 지켜야 한다. 나병 환자처럼 부정하여 만질 수도 없던 나를 만지시고, 공감으로 불쌍히 여기사 나와 같이 되신 주님을 묵상하고 기억하라. 은혜를 기억하고 묵상하는 게 마음을 지키는 방도다. 은혜를 생각할수록 하나님이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해진다. 질주를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거대한 벽에 부딪혀 나뒹굴지도 모르지만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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