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4.05.20.(월)
정리: 2024.05.20.(월)
마가복음 4:35-41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누구인지 알기에 신뢰할 수 있는 법
그와 함께라면 안전하다. 그는 만유의 주요, 돌들로도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분이며, 섬들의 노래를 받으실 분이다.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이요, 나를 인도하는 빛이다. 그러니 사망에서 광풍랑(狂風浪)이 일어도 나는 안전하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이적과 기사들을 체험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오면서도 그분이 누구신 줄 몰랐었다. 심지어 바람과 바다도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걸 기이히 여겼다. 나도 이제까지 그래 왔었다. 제자들처럼 예수께서 보내셔서 전도도 하고 놀랍고 감격스러운 사건들을 겪어오면서도, 주께서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믿지 않았다.
오늘날 감사한 것은, 나를 저 심연 끝으로 떠미는 거대한 파도가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전이라면 큰 두려움에 사색이 되어 제자들이 예수님을 다급히 깨웠던 것처럼 기도했을 것이다. 어찌 내게 이러실 수 있냐고 따지거나, 반대로 앞으로 안 그럴 테니 이번만 살려달라고 매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야 나는 잠이 든 예수님의 곁에 함께 누울 수 있다. 나와 내가 탄 배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온 다른 배들까지 지극히 안전하다는 걸 이제는 믿을 수 있다. 오늘 첫 문단에 적은 주께 대한 표현들이 화술로 칭송한 것이 아닌, 실제로 그러하신 분이란 걸 이전보다 깊이 알게 되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심쩍은 걸 믿어야 하기 때문에 강조해서 세게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분이 원래 그런 분이기에 담담하게 객관적 사실을 믿을 뿐이다.
훗날의 제자들도 칼이나 기근이나 로마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롬 8:35-3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며(골 1:24) 담담하게 순교하는 선교의 길을 걸어갔다. 용기가 생겼기 때문일까? 나는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이 임했으니 담대할 수 있었다고.
그런데 요즘은 다른 생각도 든다. 제자들, 즉 사도들은 자신을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기에(눅 9:23), 자신의 의지와 용기와 담대함으로 죽음의 위협에 맞선 게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간 거라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망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그 어떤 것들이라도 ‘넉넉히’ 이긴 거라고(롬 8:37-39). 그래서 눈에는 투지보다 평안이 있었을 거라고. 자신의 열망이 아닌 죽음을 이기는 주의 소망으로.
나도 요즘 내가 죽고 예수 사는 나날을 살다 보니, 이 땅에서 두려울 것도 집착하여 탐낼 것도 없어졌다. 전에는 늘 비참함 속에 근근이 기어야 하는 처지가 절망스러워서 내 삶의 통제권을 내가 가지려 했고, 나아가 내 주변 환경에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했다. 물론 현실성이 없는 판타지 소설 같은 바람이었기에 더 비참해졌다. 내 뜻과 계획은 언제든 어그러져 왔고, 이루어진 적도 없다. 그래서 원망하고 아쉬워했었는데, 이제는 내 뜻과 계획이 사라진 자리를 주의 뜻과 계획대로 인도받는 빈 자리로 남겨둘 수 있어서 감사하다. 주께서 내 걸음을 이끄시니 나는 충만하다. 주의 뜻과 계획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완전하니, 내 인생의 통제권을 주께 돌려드리며, 평안히 신뢰한다.
그래서 나는 보고 싶다. 내 주께서 세상 만물과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신다는 걸. 이미 알고 믿으며 고백하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따르지만, 그래도 야베스의 기도(대상 4:10)를 드리며 주의 긍휼과 은혜와 자비를 입고 싶다. 잔잔한 호숫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낚싯대를 드리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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