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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마가복음 5:35-43 | 죽은 자 같지만 살아있다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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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05.25.(토)
정리: 2024.05.25.(토)


마가복음 5:35-43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죽은 자 같지만 살아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은, 끝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 이에 사도신경도 이렇게 신앙을 고백한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 아멘.” 그래서 성경은 믿음 안에서 죽은 이들을 ‘잔다’고 표현한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무덤에서 자는 자들이 다 일어나서, 믿음 안에서 자던 사람은 영생이신 하나님과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고, 믿음을 반역한 사람들은 영벌에 처한다. 일반에서 육신의 호흡이 끊긴 것을 죽음이라 하나 성경은 잠으로 표현하는데, 영벌에 들어가는 이들은 영원히 살아있어도 성경은 영생한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태초부터, 성경은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이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경고에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도 죽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최초의 인류를 추방하셔서 관계가 단절된 것부터가 이미 생명을 떠난 것, 즉 사망에 처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은 사데 교회에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라며 회개를 명하신다(계 3:1-3). 크고 화려한 예배당, 활발한 사람들, 원활하게 돌아가는 프로그램, 뜨거운 찬양과 기도의 한국 교회. 곁에서 보면 분명 생기있고(lively) 명성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신 교회, 예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며 그분의 명과 원대로 움직이는 교회일까? 관성대로 움직이거나, 특정인이나 특정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교회와 성도들을 이용하지는 않는가?

물론 그런 교회들이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언론과 대중에 밟히고 있지만(마 5:13), 사데 교회에서도 의로운 몇 명이 있어서 본이 된 것처럼(계 3:4-6)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는 성도들과 교회들이 있다. 그리고 나부터 날마다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아 죽이고 예수 생명으로 사는지, 예수님께 삶의 주권과 주도권을 돌려드리고 있는지 점검할 일이다.

 최근 감사하게도 사데 교회와는 달리,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로 죽은 자 같지만 살아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커다란 위기에 누구에게도 나누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며 엎드리고 있다. 활동 반경과 영역을 줄이고, 사역한다고 까불던 것과 신앙 이력에서 정체성을 찾던 것을 내려놓고, 조용히 식당에서 밥을 푸며 김치를 썰고 있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모습이나, 먹던 영양제도 떨어지고 몸은 고단하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에 내가 살아있음을 안다. 나를 관 속에 들어가 땅에 묻힌 것처럼 드러내지 않고 낮추며 감춰도, 생명이신 주와 함께 있으니 바라는 게 딱히 없고 이전에 바라던 게 좌절되어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바라는 것은 하루마다 주의 뜻대로 내가 온전히 움직이는가이다. 무슨 양말을 신을까 같은 작은 선택마저도 그분의 뜻대로 하고 싶어질 정도다.

 예수께서는 거라사인에게와는 달리,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일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다. 굳이 입으로 알리지 않아도 되살아난 사람의 존재가 이미 증거다. 나도 말보다 삶으로, 그보다 ‘존재하기’로 주의 살아계심과 긍휼과 행하심을 나타내기를. 이전까지 삶이 하나님의 법도를 유린하는 지경까지 갔었으나, 이제는 나와 내가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를 소망하며, 이를 위해 쓰임 받기를 원한다. 내가 입으로 떠들며 알리는 게 아닌,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존재로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18:17)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시 27:13, 개역한글)

 

 그리고 야이로의 딸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셨듯, 나를 먹이시고 내게 채우소서. 이제 생일 다음날인 월요일이 오면 카드가 막히고, 여전한 큰 어려움으로 막대한 지출을 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며 나는 평안합니다.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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