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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마가복음 6:1-6 | 성도가 가서 있어야 할 믿음의 자리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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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05.27.(월)
정리: 2024.05.28.(화)


마가복음 6:1-6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제자들도 함께 갔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서 설교하셨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대단하셨다. 사람들이 말했다. “저 사람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인지 미처 몰랐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지혜로워지고, 이런 능력을 갖게 되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느새 그분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목수요 마리아의 아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를 어려서부터 알았다. 그의 동생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 그리고 그의 누이들도 우리가 안다. 도대체 그는 자기가 누구라고 저러는 것인가?” 그들은 예수에 대해 조금 아는 것에 걸려 넘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 자기 친척, 자기가 어려서 놀던 길목에서는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많은 일을 행하실 수 없었다. 몇몇 병자들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신 것이 전부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 다른 마을을 다니시며 가르치셨다. (『메시지』 성경, 6절은 개역개정 차용)

 

나의 묵상: 성도가 가서 있어야 할 믿음의 자리

전에 하던 관습을 끊거나, 언어 습관이 변하거나, 평소 같으면 화를 낼 상황에 인내하고, 배려와 사랑이 늘어나며 온유해진다. 거듭난 생명은 타락한 본성과 다르기에, 평소에 보던 사람이나 평상시 알던 사람, 그리고 전에 자신을 알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긴다. 주위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어색해하면서 반기기도 한다.

그런데, 갓 거듭난 사람을 포함하여,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에 몇 가지 난처함을 겪을 수 있다. 첫째는 전에도 적었듯이, 영적 갓난아이로서 비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경험치와 감이 쌓이지 않은 미숙함이요, 둘째는 시간이 지나 옛 본성이 튀어나와 발생하는 당혹스러움이요, 셋째는 이러한 자신을 반대하는 주위 사람들이다. 이럴 때 오히려 가족보다 같은 경험을 하여 같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교회 성도드과 함께 있는 게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속으로 나아가자고 하셨기에, 교회에만 머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산에서 예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걸 본 베드로는 이곳이 좋으니 여기서 집 짓고 살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가자 하셨다. 산 아래에는 병 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우리도 수련회가 끝나고, 집과 학교와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나를 할퀴는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기도 한다. 때로는 내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믿음 때문에, 내게 일어난 변화 때문에 배척과 적대와 조롱을 받기도 한다. 나는 사랑하려 해도 나와 내가 믿는 분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회복된 본성의 성품과 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뭘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나, 대화조차 거부하고 화부터 내는 경우라면 함께하기 어렵다.

이럴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고 떠나셨다. 고향과 자라온 곳을 떠나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다니셨다. 과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를 떠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이동했다. 물론 예수께서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갈 길을 지도하신다. 회복된 거라사인은 당시 집을 나와 무덤가에서 살고 있었기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신앙 공동체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나를 과거의 모습으로만 기억하고 오해하는 건 숱하여 괜찮다. 최근의 일로 내가 큰 죄인으로 여겨져도, 그 덕분에 이제 하나님과 더 깊어진 요즘,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실은 답은 간단하다. 내 주 예수께서 계신 곳, 그분이 가자 하시는 곳, 그분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곳이 그곳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나는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모든 길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고 가면 된다. 물 속을 걷는 것 같은 요즘이나, 주님이 내 호흡이시니 나는 죽어도 산다.

생일인 어제는 아침부터 괴로웠다. 전자소송홈페이지를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올라와 있는 사건 기록을 보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렇게 참석한 예배에서, 찬양 인도자는 두려워하지 말 것을 주제로 한 선곡들로 찬양 시간을 진행했다. 가사를 곱씹으며 다시 하나님께 내 믿음을 둘 수 있었다.

설교는 성도의 서로 사랑이 주제였다. 나는 슬쩍 찬양 인도자의 반응을 살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청년들과는 자주 충돌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성격에, 충돌이 일어난 사람과는 그냥 관계를 끊다 못해 외면하는 연약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예수님의 이야기 속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인데, 그리고 거악을 저지르고 면제받지도 못한 사람인데, 어찌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을까(마 18:23-35).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설교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과 생각마저 인도하시고 주관하신다.

생일이라며 가족들로부터 계좌로 얼마를 받았다. 생각보다 큰 액수여서 놀랐고 감사했다. 그리고 카드사에서 출금을 하는 오늘, 출근길에 계좌를 확인해보니 다행히 마이너스가 아니었다. 카드가 막히지 않아 감사했다. 통장에 3만원이 남았는데, 매달 1일 선교사 두 분께 1만원씩 후원을 하니, 이를 제하고도 1만원이 남는다. 잔고를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게다가 예전에 카카오톡에 받고 싶은 선물로 몇 가지 영양제를 올려놓고 있고 있었는데, 몇몇 분들이 챙겨주셨다. 어제 묵상에서 카드가 막히고 영양제가 떨어졌다고 했었는데, 감사한 일이다. 주는 나를 돌보시는 분이다. 아직 남은 거대한 어려움도 그분께서 다루시고, 나를 최선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는다.

 이 하나님을 내가 기도하는 사람도 의지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앞서 적은 갓 거듭난 이들이 겪는 새로운 어색함을 주위 사람들과 겪더라도, 더 좋은 것을 알았고 얻었으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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