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2023.11.04.(토)
정리: 2023.11.04.(토)
마가복음 6:1-6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변화와 편견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메시지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메시지마저 거부했다. 그렇다고 사람을 제대로 본 것도 아니었다. 전에 없던 메시지를 전하면 변화를 알아봐야 할 사람들이, 전에 이런 사람이지 않았냐고 놀라는 수준에서 그친다.
현재 그 사람이 바뀌었어도 과거에 누군가에 대해 쌓아온 관점을 바꾸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사람은 원래 그래’라는 생각은, 그 사람을 다듬고 가꾸어오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과감히 말하자면, 편견은 죄다.
설령 그 사람이 아직 엉성하다고 해도, 그를 통해 통찰과 메시지를 전하실 하나님, 그를 변화시킬 하나님을 기대해보는 건 어떨까. 혹 변화가 없더라도, 그 사람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귀중한 존재이지 않은가. 그 사람이 악인이더라도,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는 죄를 짓지 않고 판단과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서 용서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분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다. ‘눈에는 눈’을 넘은 십자가의 용서는 이전의 나를 딛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이며, 이로써 주변에서 괄목상대할 변화와 성장이 내게서 나타난다.
변화하고 성장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건 그 사람을 대하는 사람(자신과 타인 모두)의 역량에 달려있다. 그릇이 좁고 낡으면 선입견을 버리지 않고 배척할 뿐이다.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 없이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 이것이 완고함이고 완악함이다.
쓰다 보니 내가 완고하고 완악한 사람이라는 걸 살필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을 찍어놓고 회복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의 그릇을 넓히시고 사랑의 분량을 키우시기를 구한다. 나 스스로는 그런 사랑과 용납이 불가능하다 여기지만(스스로에게조차 편견이 있구나), 인간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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