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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군대(2008.10.14.-2010.08.25.)

사도행전 15:22-35 | 갈림길에서 필요한 결단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6.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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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9.05.16.(토)
정리: 2026.08.06.(목)


사도행전 15:22-35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26 (25절에 포함되어 있음)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30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 (없음)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갈림길에서 필요한 결단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장하여, 혹은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굳게 믿고 내게 들어온 생각이나 사람의 말이 있다. 유혹 같기도 하고 가르침 같기도 한 이러한 것들의 요체는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더욱 혼란스럽다. 내가 지난날 하나님께 받은 소명과 명령과 주께 드렸던 고백과 서원을 탁하게 할 만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희석이고 타협이다. 내 마음이 혼란한 중에 나는 비틀거려 실족할 것만 같다. 타협안에 귀가 솔깃하며, 적정선을 유지하는 안전선을 쳐두었지만 실상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하나님께 범죄한 자가 되어 있었다. 나에게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처럼 명확한 답이 필요했다.

아니, 나는 답을 알고 있다. 문제는 내가 이 혼란을 즐길 것인가 단호하게 끊고 내 마음을 확정할 것인가 하는 과단성의 결여다. 나는 독신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바 된 나실인이며, 내 눈과 세운 언약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휴가를 앞두고, 이성 친구를 대하는 나의 태도를 하나님께 드려 오롯이 서야 한다. 내 임의로 할 수 없다.

성경에서는 몇 명의 나실인이 등장한다. 이 묵상을 기록하는 동안 떠오른 두 명을 대어 보고자 한다. 그중 하나는 삼손이다. 그의 마지막이 어떠했든, 그것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나 결국은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실례 중 하나이든, 결국 그는 ‘나실인으로서는 실패한 자’가 되었다. 그가 무너진 영역은 성적인 부분, 즉 남자로서 가장 취약한 것이었다.

일생을 쭉 지켜오다가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삼손은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댐에 난 작은 구멍으로도 댐이 무너져 마을이 침수되는 대참사가 일어나는 것과 같았다. 그 강물에 빠져 삼손은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는 결국 애인이 그의 모든 삶을 지배하도록 자신을 내어주었고, 신뢰하였으며, 심중의 말을 속삭였고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우상 숭배를 한 것이다. 여기에 과거 삼손의 나실인으로서의 거룩했던 모습이나 신실함, 사명감은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그의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이 아닌 들릴라가 되었다.

(여기서 오늘날의 한 인물이 떠오른다. 그에 관하여 자세한 내용도 모르거니와 의중은 하나님께서만 아시기에 자세히 적지는 않겠으나, 그가 과거에 많은 은혜로운 찬양을 짓고 노래하였던 사역자였음을, 그러나 아내 몰래 동거녀를 두고 끊지 못했음을 알고는 있다. 최덕신 형제가 그러기에 나는 슬프며, 경계의 교훈이 되었기에 두렵다)

반면에 다른 하나의 나실인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됨을, 그 언약의 집응점인 예수를 만나고,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로서의 사역 출발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짐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자신의 즐거움으로 인해 기뻐하였다. 진정 아무도―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다.

나는 이와 같은 오늘 묵상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기록한 대로 나에게는 단호함이 있는가? 진정 부끄럼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 거리낌 없이 찬송할 자로서 합당한가? 결과를 경험한 자들의 예가 삼손과 세례 요한으로 대비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펜을 놀릴 뿐 아직도 타협과 악수한 손을 놓지 못하는 나에게 다윗의 고백이 내 마음을 때린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5:18)

사역 후원 및 자율 헌금: 하나은행 748-910034-87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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