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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사무엘하 6:1-11 | 가감하지 않은 하나님의 뜻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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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궤에 닿는 웃사의 손

작성: 2024.05.01.(수)
정리: 2024.05.01.(수)


사무엘하 6:1-1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가감하지 않은 하나님의 뜻

사울 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좋은 가축들을 남겨놓았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을 방문해서 묻자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가축들을 남긴 거라며 자랑한다. 사무엘은 (아마도) 한숨을 푹 쉬고는, 사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그제야 사울은 당황하며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전리품을 자랑한 건 사울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 다윗 성으로 들여오고자 했다. 하나님의 궤는 모세 때부터 전해져온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다. 다윗은 성대한 귀환식을 준비하여 거행한다. 오늘날 해외로 반출된 국보가 돌아올 때 그냥 들여오지 않듯이. 몇 년 전 대한민국 정부에서 홍범도 장군 유해를 카자흐스탄 정부 및 현지 고려인 주민들과 협의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모셔오고’, 성대하게 송환‘식’을 진행하며 생중계까지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하나님의 궤가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이 다윗과 이스라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무게감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상 때부터 우리를 돌보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고, 우리 민족과 나라에 함께하신다는 상징이었다. 국가와 민족과 왕위의 정체성과 정통성은 물론 자부심이 결집된 크나큰 상징.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시는 분이다. 모세 때 제정된 율법에는, 하나님의 궤에 달린 고리에 장대를 끼워 달고 가마를 태우듯이 네 사람이 어깨에 장대를 메도록 되어 있다.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그 거룩과 영광에 죄된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모세에게 대신 산에 다녀오라고 했듯이,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죄된 사람이 다가오면 견디지 못하고 달려들 것 같으니 산에 금줄을 쳐서 접근을 막게 하셨듯이, 하나님의 궤도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서 사람이 건드리면 안 됐다. 장대를 메서 궤 본체에 닿지 않게 한 것이다(민 4:15). 물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나 하나님의 궤 자체가 무슨 효력이 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지정한 것으로 순종의 여부를 알아보는 가늠자였다.

그런데 다윗은 새 수레에 궤를 싣고 악대를 세워 요란하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며 행사를 거행했다. 오늘날로 치면 군악대의 행진에 고급 캐딜락이나 롤스로이스 같은 의전용 차량으로 카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이다. 다윗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최고로 예우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상관없이, 이전의 사울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 것이었다. 다윗의 불순종으로 사고가 나자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들여오지 않고 두려워서 이 일에 손을 뗀다. 오늘날 속칭으로 말하면 ‘잠수를 탄’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 사랑한다면서 내가 해주고 싶은 대로 이것저것 잘해주는 것보다, 상대방에게 귀 기울이고, 대화에 집중하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게 더 큰 사랑, 아니 진짜 사랑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성도들과 이웃과 창조 세계를 사랑하지 않거나, 화려한 성취와 성공이나 거대한 건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여, 교회가 맛 잃은 소금이 되는 요즘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내 기준, 내 소견, 내 욕망대로 지레짐작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더하거나 내 뜻대로 빼거나(즉 가감하거나), 현실이나 다른 것이 두려워 타협하지 말고, 당사자에게 묻자. 당연히 기도와 성경으로. 물론 기도하며 성경을 읽을 때 내 욕심과 내 관점을 내려놓고, 주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구해야 한다. 우선 분명히 기록되어 드러난 하나님의 소원이 있으니, 이것부터 마음에 새기고 손으로 행하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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