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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since 2019.07(2023.01-04 제외)

사사기 7:1-8 | 도망자에게 은혜를

by 조나단 브레이너드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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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4.03.18.(월)
정리: 2024.03.18.(월)


사사기 7:1-8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개역개정)

 

나의 묵상: 패배자에게 은혜를

오늘따라 유독 우울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드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겨내 보려고 오랜만에 달리기라도 하려고 채비했는데, 특정 옷을 못 찾았다는 내적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고 몇 시간을 누워 있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다는 핑계를 또 스스로에게 대며 오후 4시쯤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를 했다. 달리지 못한, 아니 하지 않은 자신이 싫어졌다.

타의로 컴퓨터를 켜서 주섬주섬 작업을 하되, 키보드보단 마우스 위주로만 했다. 고작 타자를 치는 것조차 힘이 드는 일로 여겨져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우스로만 간단한 작업을 하고도 피로해졌다며 저녁 잠을 잤다. 지친 것도 있었지만 당장의 복합적인 부정적 정서를 잊기 위해서였기도 하다. 도피성 잠이었다.

깨고 나서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해야 하는데 한 게 없으니, 되는 일이 없으니 여전히 답답한 건 당연하다. 혹시 몸이나 호르몬 문제인가 싶어 인터넷에 갑상선 관련 질환과 그 증상을 검색해보았다. 의심은 가는데 제대로 검사를 받아본 건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다. 차라리 몸의 문제라면 좋겠다는 생각이어서 검색해봤던 거였다. 그렇다고 하면 치료하면 되니까. 하지만 오늘 혈액 검사 결과를 확인하려 병원에 가지도 않았다. 사람이 불러도 나가지도 않았고.

성경 묵상도 안 하려다가, 죽지 않고 살아야겠어서 겨우 책장을 폈다. 마음에 감동이 없으면 그냥 덮으려고 했는데, 본문에서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의 처지와 겹쳐 보이며 펜을 들었다.

그 인물들은 참전하러 왔다가 집에 돌아간 ‘두려워 떠는 자’들 이만 이천 명이다. 이들은 처음에 어떤 마음으로 왔을까? 애국심도 있었을 테고, 압제와 수탈에 도저히 못 살겠다며 농기구를 쥐고 달려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창칼을 든 적군 앞에서,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죽으면 고향의 처자식은 누가 돌보지? 그리고 그동안 당해온 역사 때문에 무의식에 박힌 공포가 전의를 억눌렀을 수도 있다. 그들의 강함을 익히 아는 우리지 않은가.

이들은 분명 양털에 이슬이 가득했다가 마르는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했지만 실전 앞에서 주저했다.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보고, 홍해가 갈라진 길을 걸어 나오고, 하나님의 손길로 보호받으며 광야를 지나왔어도, 거구의 가나안 자손들을 보고 하나님을 잊은 채 두려워했던 그들의 조상들처럼 말이다. 이들은 조상들처럼 광야에서 죽지는 않았지만, 한 것 없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목숨은 건졌지만 부끄러움을 안고. 싸우지도 않았지만 패배감을 안고. 지금의 내가 그렇다. 사회에서 역할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연명만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승리했다. 대표팀이 이겼으니 우리도 이긴 것이다. 직접 싸우지도 못하고 부끄럽게 도망쳤지만,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승리와 승리의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중도 포기했지만 다른 이들의 노력을 대가 없이 받았다. 훗날 다윗도 행군하다 뒤처져 전투에 참여하지 못한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준다(삼상 30:21-25).

그리고 <메시지 성경> 번역본을 보면, 이들이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식량과 물자를 전장에 제공하고 귀향한 것이었다. 승리에 뭐라도 보탬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십자가의 은혜를 대가 없이 받으면서, 약간의 헌신, 했다가 물러나는 헌신마저도 받아주시는 하나님, 승리를 나눠주시는 하나님이 내게 있다. 승전 소식을 듣고 이제는 나도 싸울 수 있겠다며 일어나는 귀환병처럼, 나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고 싶다. 다 죽어 마른 뼈마저 살아있고 강성한 주의 군사로 일으키신 하나님(겔 37:1-14)께서, 내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기를 구한다. 은혜의 하나님, 이 어둠 속에서 심중으로나마 읊조리는 기도를 들으소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시 1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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